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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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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林宗 每行宿逆旅 輒躬自灑掃 及明去하여 後人至하여 見之曰
必郭有道昨宿處也注+① 續漢書曰 “郭泰, 字林宗, 太原介休人. 泰少孤, 年二十行學, 至屈伯彦精廬. 乏食, 衣不蓋形, 而處約味道, 不改其樂. 李元禮一見, 稱之曰 ‘吾見士多矣, 無如林宗者也.’ 及卒, 蔡伯喈爲作碑, 曰 ‘吾爲人作銘, 未嘗不有慙容, 唯爲郭有道碑頌, 無愧耳.’ 初, 以有道君子徵, 泰曰 ‘吾觀乾象․人事, 天之所廢, 不可支也.’ 遂辭以疾.”리라하다


1-11【곽임종郭林宗(곽태郭泰)은 매번 길을 떠나 여관에 묵을 때마다 자신이 직접 방을 쓸고 닦았다. 다음날 그가 떠난 뒤 뒷사람이 도착하여 그곳을 보고는 말했다.
“이곳은 필시 곽유도郭有道(곽태郭泰)가 어제 묵었던 곳이리라.”注+에 말하였다. “곽태郭泰는 자가 임종林宗이고, 태원太原 개휴介休 사람이다. 곽태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다. 20세 때 공부하러 성고成皐에 있는 굴백언屈伯彦학사學舍에 갔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의복이 몸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였으나 곤궁한 중에서도 도를 음미하였고 자신의 즐거움을 고치지 않았다. 이원례李元禮(이응李膺)가 한 번 그를 보고는 ‘내가 선비들을 많이 보았으나 임종만 한 이는 없었다.’라고 칭찬하였다. 곽태가 죽자 채백개蔡伯喈(채옹蔡邕)가 그의 비문을 짓고는 ‘내가 남을 위하여 묘지명을 지으면서 민망한 마음이 안 든 적이 없었으나, 오직 곽유도郭有道를 위해 묘비명을 지을 때만 부끄러운 마음이 없었다.’ 하였다. 처음에 곽태는 ‘내가 천문天文인사人事를 살펴보니 하늘이 없애는 것은 부지할 수 없다.’라 하고 마침내 병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이응李膺이응李膺
곽태郭泰곽태郭泰


역주
역주1 續漢書 : 西晉 때 사람 司馬彪가 편찬한 紀傳體 史書이다. 帝紀 9권, 志 8권, 列傳 65권, 餘篇 1권 총 83권이었으나 모두 散失되었고, 輯本이 남아 있다. 梁나라 사람 劉昭가 이 책의 8志에 注를 낸 것이 별도로 간행되었는데, 范曄의 ≪後漢書≫에 포함되었다. 사마표(240~306)는 字가 紹統이고 河内 温(지금의 河南 温縣) 사람으로, 서진의 史學家이자 文學家이다.
역주2 有道君子로 부름을 받았는데 : 漢나라 초부터 황제의 명으로 賢良하고 方正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고, 이후에 敦樸․有道․賢能․獨行․高節․質直․淸白․敦厚의 부류로 늘려 천거하였다. 여기서는 郭泰가 ‘有道’의 부류로 천거받았음을 말한다.(≪世說音釋≫)
역주3 (城阜)[成皐] : 저본에는 ‘城阜’로 되어 있으나, 司馬彪의 ≪續漢書≫ 〈郭泰傳〉, 范曄의 ≪後漢書≫ 〈郭泰傳〉, 安永本에 의거하여 ‘成皐’로 바로잡았다. 成皐는 지금의 河南省 汜水縣 서북쪽에 있던 縣 이름이다.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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