郭林宗은 每行宿逆旅에 輒躬自灑掃라 及明去하여 後人至하여 見之曰
此
는 必郭有道昨宿處也
注+① 續漢書曰 “郭泰, 字林宗, 太原介休人. 泰少孤, 年二十行學, 至屈伯彦精廬. 乏食, 衣不蓋形, 而處約味道, 不改其樂. 李元禮一見, 稱之曰 ‘吾見士多矣, 無如林宗者也.’ 及卒, 蔡伯喈爲作碑, 曰 ‘吾爲人作銘, 未嘗不有慙容, 唯爲郭有道碑頌, 無愧耳.’ 初, 以有道君子徵, 泰曰 ‘吾觀乾象․人事, 天之所廢, 不可支也.’ 遂辭以疾.”리라하다
1-11【보補】곽임종郭林宗(곽태郭泰)은 매번 길을 떠나 여관에 묵을 때마다 자신이 직접 방을 쓸고 닦았다. 다음날 그가 떠난 뒤 뒷사람이 도착하여 그곳을 보고는 말했다.
“이곳은 필시
곽유도郭有道(
곽태郭泰)가 어제 묵었던 곳이리라.”
注+① 에 말하였다. “곽태郭泰는 자가 임종林宗이고, 태원太原 개휴介休 사람이다. 곽태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다. 20세 때 공부하러 성고成皐에 있는 굴백언屈伯彦의 학사學舍에 갔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의복이 몸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였으나 곤궁한 중에서도 도를 음미하였고 자신의 즐거움을 고치지 않았다. 이원례李元禮(이응李膺)가 한 번 그를 보고는 ‘내가 선비들을 많이 보았으나 임종만 한 이는 없었다.’라고 칭찬하였다. 곽태가 죽자 채백개蔡伯喈(채옹蔡邕)가 그의 비문을 짓고는 ‘내가 남을 위하여 묘지명을 지으면서 민망한 마음이 안 든 적이 없었으나, 오직 곽유도郭有道를 위해 묘비명을 지을 때만 부끄러운 마음이 없었다.’ 하였다. 처음에 곽태는 ‘내가 천문天文과 인사人事를 살펴보니 하늘이 없애는 것은 부지할 수 없다.’라 하고 마침내 병을 핑계로 거절하였다.”이응李膺 곽태郭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