宛陵未爲不貴
注+① 中興書曰 “羲之自會稽王友, 改授臨川太守. 王述從驃騎功曹, 出爲宛陵令. 述之爲宛陵, 多脩爲家之具, 初有勞苦之聲. 丞相王導使人之曰 ‘名父之子, 屈臨小縣, 甚不宜爾.’ 述答曰 ‘足自當止.’ 時人未之達也. 後屢臨州郡, 無所造作, 世始嘆服之.”라하다
18-29 왕수령王脩齡(왕호지王胡之)이 왕장사王長史(왕몽王濛)에게 물었다.
“우리 집안의 왕림천王臨川(왕희지王羲之)은 그대 집안의 왕완릉王宛陵(왕술王述)과 비교해 어떻습니까?”
“왕완릉도 명성이 높지 않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注+① ≪중흥서中興書≫에 말했다. “왕희지王羲之는 회계왕會稽王(사마욱司馬昱)의 로 있다가 다시 임천태수臨川太守에 제수되었고, 왕술王述은 표기장군驃騎將軍의 공조功曹였다가 완릉령宛陵令으로 나갔다. 왕술이 완릉현령이 되었을 때 가구를 많이 만들었기에 처음에는 괴롭다는 백성들의 원성이 있었다. 승상丞相인 왕도王導가 사람을 시켜 ‘명망 있는 부친(왕승王承)의 자식으로 몸을 굽혀 작은 현에 부임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은 몹시 옳지 않다.’라고 설득하니, 왕술이 ‘충족되면 자연히 그만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당시에 사람들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여러 번 주군州郡에 부임해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말에 탄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