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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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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稽虞𩦎注+① 虞光祿傳曰 “𩦎, 字思行, 會稽餘姚人, 虞翻曾孫, 右光祿潭兄子也. 雖機幹不及潭, 而至行過之. 歷吏部郞ㆍ吳興守, 徵爲金紫光祿大夫, 卒.” 元皇時注+② 朱鳳晉書曰 “帝, 諱睿, 字景文. 祖伷, 封瑯琊王, 父恭王覲嗣, 帝襲爵爲瑯琊王. 少而明惠. 因亂過江起義, 遂即皇帝位.” 諡法曰 “始建國都曰 ‘元’.” 與桓宣武 同俠이라 其人有才理勝望하여 王丞相 嘗謂𩦎曰
孔愉 有公才 而無公望注+③ 孔愉別傳曰 “愉, 字敬康, 會稽山陰人. 初辟中宗參軍, 討華軼有功, 封餘不亭侯. 愉少時嘗得一龜, 放於餘不溪中, 龜中路左顧者數過. 及後鑄印, 而龜左顧, 更鑄猶如此. 印師以聞, 愉悟, 取而佩焉. 累遷尙書左僕射, 贈車騎將軍.”이오 丁潭 有公望이나 而無公才注+④ 會稽後賢記曰 “潭, 字世康, 山陰人, 吳司徒固曾孫也. 沈婉有雅望, 少與孔愉齊名. 仕至光祿大夫.” 晉陽秋曰 “孔敬康ㆍ丁世康ㆍ張偉康俱著名, 時謂會稽三康. 偉康, 名茂. 嘗夢得大象, 以問萬, 雅曰 ‘君當爲大郡, 而不善也. 象, 大獸也, 取其音狩, 故爲大郡. 然象以齒喪身.’ 後爲吳郡, 果爲沈充所殺.” 兼之者 其在卿乎인저라하다
𩦎未達而喪注+⑤ 虞光祿傳曰 “𩦎未登台鼎, 時論稱屈.”하니라
【頭註】
劉云 “自福不及耳.”


17-19 회계會稽우비虞𩦎注+① ≪우광록전虞光祿傳≫에 말했다. “𩦎는 사행思行으로 회계會稽 여요餘姚 사람이다. 우번虞翻증손曾孫이고 우광록대부右光祿大夫 우담虞潭의 형의 아들이다. 비록 재치와 재능은 우담에게 미치지 못했으나 훌륭한 품행은 그보다 나았다. 이부랑吏部郞오흥태수吳興太守를 역임했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불려갔다가 죽었다.”동진東晉원제元帝注+주봉朱鳳의 ≪진서晉書≫에 말했다. “원황제元皇帝이고 경문景文이다. 조부 사마주司馬伷낭야왕瑯琊王에 봉해졌고 부친 공왕恭王 사마근司馬覲이 〈이를〉 이었고 황제가 작위를 이어받아 낭야왕瑯琊王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때문에 강남으로 건너와 의병義兵을 일으켰다가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시법諡法에서는 “처음 국가의 수도를 건설한 사람을 ‘’이라 한다.”라고 한다.
환선무桓宣武(환온桓溫)와 동료였다. 그에게는 뛰어난 재주와 훌륭한 명망이 있었다. 왕승상王丞相(왕도王導)이 한번은 우비에게 말했다.
공유孔愉삼공三公이 될 만한 재주가 있으나 삼공에 걸맞는 명망이 없고,注+③ ≪공유별전孔愉別傳≫에 말했다. “공유孔愉경강敬康으로 회계會稽 산음山陰 사람이다. 처음에는 중종中宗(사마예司馬睿)의 참군參軍으로 불려갔었고, 여부정후餘不亭侯에 봉해졌다. 공유는 젊을 때 거북이 한 마리를 얻어 여부계餘不溪에 놓아준 적이 있었는데, 거북이가 가는 도중에 여러 번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나중에 인장을 주조하는데 〈인장 위의〉 거북이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다시 주조했는데도 여전히 그러했다. 인장 장인이 보고하자 공유는 깨닫고 〈그것을〉 가져와 찼다. 여러 벼슬을 거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었고 〈사후에〉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추증되었다.” 정담丁潭은 삼공에 걸맞는 명망이 있으나 삼공이 될 만한 재주가 없습니다.注+에 말했다. “정담丁潭세강世康이고 산음山陰 사람으로 나라 사도司徒 정고丁固증손曾孫이다. 차분하고 온화하며 명망이 있어 젊어서부터 공유孔愉와 이름을 나란히 했다. 벼슬은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이르렀다.”
진양추晉陽秋≫에 말했다. “공경강孔敬康(공유), 정세강丁世康(정담), 장위강張偉康은 모두 이름이 널리 드러나 당시 사람들이 ‘회계삼강會稽三康’이라고 불렀다. 위강偉康은 이름이 이다. 한번은 큰 코끼리를 잡는 꿈을 꾸고 〈점쟁이〉 만아萬雅에게 물어보자, 만아가 ‘그대는 큰 의 태수가 될 것입니다만 좋지는 않습니다. 코끼리는 큰 짐승[]인데 〈짐승[]은〉 그 글자의 발음이 와 같기 때문에 큰 의 태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코끼리는 상아 때문에 목숨을 잃지요.’라고 하였다. 나중에 오군吳郡의 태수가 되었는데 말한대로 심충沈充에게 살해당했다.”
이것을 겸비한 사람은 그대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비는 현달하지 못하고 죽었다.注+⑤ 〈우광록전虞光祿傳〉에 말했다. “우비虞𩦎태정台鼎(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르지 못하자 당시 여론이 원통한 일이라고 했다.”
두주頭註
유신옹劉辰翁:자신의 복이 〈그 자리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


역주
역주1 난리 : 西晉 懷帝 때인 永嘉 5년(311)에 匈奴族의 劉淵이 세운 漢나라가 永平城 전투에서 진의 주력부대를 섬멸하고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회제를 포로로 잡았던 ‘永嘉의 亂’을 말한다.
역주2 宣武(桓溫)와 동료였다 : ≪晉書≫ 〈虞𩦎傳〉에 “與譙固․桓彝俱爲吏部郞, 情好甚篤.”이라고 한 것에 따르면 ‘宣武’는 ‘宣城’이 되어야 할 듯하고 ‘同俠’도 ‘同僚’의 오류인 듯하다. 우선 ‘同俠’은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 ‘同僚’로 고쳐 번역하였다.
역주3 華軼을……있어 : 華軼은 西晉 말기의 大臣이다. 永嘉의 亂이 발생하여 洛陽이 劉淵의 공격에 함락되고 懷帝가 포로로 잡히자 司空인 荀藩이 司馬睿(나중의 元帝)를 맹주로 추대하였고 사마예는 이에 상급 관리들을 교체했는데, 江州刺史였던 화일은 사마예의 명을 따르지 않다가 죽었다.
역주4 ≪會稽後賢記≫ : 鍾離岫가 지었는데 그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隋書≫ 〈藝文志〉과 ≪通志≫에는 ≪會稽後賢傳記≫ 2권이라고 하였고, ≪舊唐書≫ 〈藝文志〉, ≪緯畧≫에는 ≪會稽後賢傳≫ 3권이라고 하여 ‘記’자가 없다. 지금은 일부만 전한다.
역주5 : ≪晉書≫ 〈張茂列傳〉에는 ‘推’로 되어 있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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