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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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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淮 作關中都督하여 甚得民情하고 亦屢有戰庸注+ “郭淮, 字伯濟, 太原陽曲人. 建安中, 除平原府丞. 黃初元年, 奉使賀文帝踐阼, 而稽留不及. 群臣歡會, 帝正色責之曰 ‘昔禹會諸侯於塗山, 防風氏後至, 便行大戮. 今溥天同慶, 而卿最留遲, 何也?’ 淮曰 ‘臣聞五帝先敎, 導民以德, 夏后政衰, 始用刑辟. 今臣遭唐虞之世, 是以知免防風氏之誅.’ 帝說之, 擢爲雍州刺史, 遷征西將軍. 淮在關中三十餘年, 功績顯著, 遷儀同三司, 贈大將軍.”이라 淮妻 太尉王凌之妹 坐凌事하여 當幷誅注+② 魏略曰 “凌, 字彦雲, 太原祁人, 歷司空ㆍ太尉ㆍ征東將軍. 密欲立楚王彪, 司馬宣王自討之, 凌自縛歸罪, 遙謂太傅曰 ‘卿直以折簡召我, 我當不至邪?’ 太傅曰 ‘以卿非肯逐折簡者也.’ 遂使人送至西. 凌自知罪重, 試索棺釘, 以觀太傅意, 太傅給之. 凌行至項城, 夜呼掾屬, 與決曰 ‘行年八十, 身名俱滅, 命邪.’ 遂自殺.” 使者徵攝甚急하니 淮使戒裝하여 克日當發한대 州․府文武及百姓 勸准擧兵이나 淮不許
至期遣妻하니 百姓號泣追呼者 數萬人이라 行數十里 淮乃命左右하여 追夫人還하니 於是 文武奔馳 如狥身首之急이라 旣至 淮與宣帝注+③ 司馬懿, 別見.書曰
五子哀戀하여 思念其母하니 其母旣亡이면 則無五子 五子若殞이면 亦復無准니이다하니
宣帝乃表하여 特原淮妻注+④ 世語曰 “淮妻當從坐, 侍御史往收, 督將及羌ㆍ胡渠帥數千人叩頭, 請淮上表留妻, 淮不從. 妻上道, 莫不流涕, 人人扼腕, 欲劫留之. 淮五子叩頭, 流血請淮, 淮不忍視, 乃命追之, 於是數千騎往追還. 淮以書白司馬宣王曰 ‘五子哀母, 不惜其身, 若無其母, 是無五子, 五子若亡, 亦無淮也. 今輒追還, 若於法未通, 當受罪於主者.’ 書至, 宣王乃表原之.”하다
【頭註】
劉云 “語甚感動, 節次皆是.”
王云 “世語簡而盡, 前後相應, 敍事工拙見矣.”


10-11 곽회郭淮관중도독關中都督이 되어 민심을 크게 얻고 역시 여러 차례 전공戰功도 세웠다.注+①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곽회전郭淮傳〉에 말하였다. “곽회는 백제伯濟로, 태원太原 양곡陽曲 사람이다. 〈 헌제獻帝건안建安 연간(196~220)에 평원부승平原府丞에 제수되었다. 〈(삼국三國) 문제文帝황초黃初 원년(220)에 사명使命을 받들어 문제의 즉위를 축하하러 갔는데 〈도중에 병이 들어〉 지체되어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즐겁게 연회를 베푸는 중에 문제가 정색을 하면서 〈곽회를〉 질책하였다. ‘ 지금 온 천하가 함께 축하하는데 그대가 가장 지체했으니 어찌된 일이오?’ 곽회가 ‘제가 들으니, 오제五帝께서 교화를 우선시하여 덕으로 백성을 인도했는데, 하나라 때에 정치력이 쇠퇴하여 형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 저는 당우唐虞(요순堯舜)와 같은 시대를 만났습니다. 이 때문에 방풍씨와 같은 주벌을 피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하자, 문제가 기뻐하고는 〈그를〉 옹주자사雍州刺史로 발탁하였고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승진시켰다. 곽회가 관중關中에 머문 30여 년 동안 공적이 뚜렷이 드러나서 의동삼사儀同三司로 승진하였고, 〈사후에〉 대장군大將軍에 추증되었다.” 곽회의 아내는 태위太尉 왕릉王凌의 누이동생인데, 에 연좌되어 〈왕릉과 함께〉 처형당하게 되었다.注+어환魚豢에 말하였다. “왕릉王凌언운彦雲으로, 태원太原 사람이며, 사공司空태위太尉정동장군征東將軍을 역임하였다. 은밀히 초왕楚王 를 옹립하려 했기 때문에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司馬懿)이 직접 토벌하니, 왕능은 스스로 자신을 결박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멀리 태부太傅(사마의)에게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대가 단지 으로 나를 부른다고 한들 내가 응당 가지 않겠소?’ 하니, 태부太傅가 ‘〈내가 토벌하러 온 것은〉 그대는 절간을 기꺼이 따를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오.’ 하고는 마침내 사람을 시켜 〈그를〉 서쪽(낙양洛陽)으로 보내게 하였다. 왕능은 스스로 죄가 막중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시험 삼아 관 뚜껑에 박는 못을 요청하여 태부의 의중을 살폈는데, 태부가 그에게 〈못을〉 주었다. 왕능의 행차가 항성項城에 이르렀을 때 밤에 〈자신의〉 속관屬官들을 불러 그들과 영결하면서 ‘나이가 곧 80세가 되는데 몸과 명성이 모두 사라지니, 천명天命이로구나.’ 하고는 마침내 자살하였다.” 사자使者가 매우 다급하게 체포해 가려 하자, 곽회는 〈아내에게〉 행장을 꾸리게 하여 기일에 맞추어 출발시키려 했는데, 의 문무 관원과 백성들이 곽회에게 거병擧兵하라고 권했으나 곽회는 듣지 않았다.
기일이 되어 아내를 보내니 울부짖으며 뒤따르는 백성이 수만 명이었다. 〈아내가〉 수십 리를 갔을 때 곽회가 마침내 좌우에게 명하여 부인을 쫒아가 데려오라고 하니, 이에 문무 관원들이 내달렸는데 마치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것처럼 다급하게 하였다. 〈아내가〉 돌아온 뒤에 곽회가 선제宣帝(사마의司馬懿)에게注+사마의司馬懿는 따로 보인다.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다섯 아들이 애달파하고 그리워하여 〈그 어미를〉 생각하니, 그 어미가 죽은 뒤에는 다섯 아들이 〈죽어서〉 없어질 것이고, 다섯 아들이 만약 목숨을 끊는다면 역시 더 이상 저도 〈죽어서〉 없어질 것입니다.”
선제宣帝가 마침내 표문表文을 올려 곽회의 아내를 특별히 사면해주었다.注+곽반郭頒의 ≪위진세어魏晉世語≫에 말하였다. “곽회郭淮의 아내가 〈그녀의 오라비인 왕릉王凌의 사건에〉 연좌되었다. 시어사侍御史가 가서 그녀를 체포하려 하니, 독장督將강족羌族호족胡族의 우두머리 수천 명이 머리를 〈땅에〉 조아리면서 곽회에게 부인을 그대로 머물게 해달라는 표문表文을 올리라고 요청했으나 곽회는 따르지 않았다. 아내가 길에 오르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사람마다 〈분노에 차서〉 주먹을 불끈 쥐고 〈시어사를〉 위협하여 만류하고자 하였다. 곽회의 다섯 아들이 머리를 〈땅에〉 찧어 피를 흘리면서 곽회에게 요청하자, 곽회가 차마 보지 못하고는 마침내 〈그녀를〉 추격하라고 명하니, 이에 수천 명의 기병이 추격하여 〈그녀를〉 데려 왔다. 곽회가 편지를 써서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司馬懿)에게 아뢰기를 ‘다섯 아들이 제 어미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몸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 어미가 〈죽어서〉 없어진다면 다섯 아들도 〈죽어서〉 없어질 것이고, 다섯 아들이 만약 죽는다면 역시 저도 〈죽어서〉 없어질 것입니다. 지금 경솔히 추격하여 〈아내를〉 데려왔으니, 만약 국법에 합당하지 않으면 주관하는 관리(형리刑吏)에게 죄를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편지가 도착하자, 사마선왕이 마침내 표문을 올려 〈그녀를〉 사면해주었다.”
두주頭註
유진옹劉辰翁:〈곽회郭淮의〉 말이 매우 감동적이고, 〈조치한〉 절차도 모두 합당하다.
왕세무王世懋:≪위진세어魏晉世語≫가 〈내용이〉 간략하면서도 완전하고 앞뒤가 서로 호응하니, 일을 서술하는 데에 솜씨가 훌륭함을 볼 수 있다.


역주
역주1 옛날에……거행하였소 : ‘塗山’은 浙江省 紹興縣의 會稽山으로, 夏나라 禹임금이 여기에서 제후를 소집했을 때, 제후인 防風氏가 가장 뒤에 왔기 때문에 우임금이 그를 죽였는데, 그의 뼈마디 하나만으로도 수레에 가득 찼다.(≪史記≫ 〈夏本紀〉)
역주2 왕능의 사건 : 魏(三國) 齊王 嘉平 원년(249)에 王凌이 그의 외조카인 兗州刺史 令狐愚와 공모하여 당시의 천자였던 齊王 曹芳을 폐위하고 曹操의 아들인 楚王 曹彪를 옹립하려 했는데, 결국 실패하여 가평 3년에 음독자살하였다.(≪三國志≫ 〈魏志 王凌傳〉)
역주3 魏略 : 魏(三國)나라의 郞中이었던 魚豢이, 晉 武帝 太康 연간(280~289)에 私撰한 위나라의 역사서로, 紀․志․列傳의 체제로 되어 있다. 원문은 산실되어 전해지지 않으나, ≪三國志≫ 裴松之의 注, ≪太平御覽≫, ≪翰苑≫ 등에 逸文이 있으며, 淸나라의 張鵬一이 그것을 집성하여 ≪魏畧輯本≫ 25권을 편찬하였다. 陳壽가 지은 ≪삼국지≫도 이 ≪위략≫을 토대로 서술된 부분이 많다.
역주4 曹彪 : 曹操의 스물다섯 명 아들 가운데 하나로 字가 朱虎이며 어머니는 孫姬이다. ≪三國志≫ 〈魏志 楚王彪傳〉에는 魏나라 嘉平 원년(249)에 兗州刺史 令狐愚와 太尉 王凌이 許昌에서 조표를 맞이하여 황제로 세우려고 모의하였는데 일이 누설되어 조표가 자살했다고 하였고, ≪世說新語≫ 〈尤悔〉에는 형인 曹丕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였다.
역주5 折簡 : 반쪽으로 쪼갠 竹簡으로, 예의를 갖추지 않은 편지를 이른다.
역주6 [魏志曰] : 저본에는 ‘魏志曰’이 없으나, ≪世說新語≫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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