潘元茂
注+① 文章志曰 “潘勖, 字元茂, 陳留中都人, 少有逸才. 獻帝時, 爲尙書郞, 遷東海相, 未發, 拜尙書左丞, 病卒.”가 作魏公冊命
注+② 後漢書曰 “曹操自爲魏公, 加九錫.”하니 人謂與訓誥
로 同風
이라하다 元茂亡後
에 王仲宣
注+③ 王粲, 別見.이 擅名
하니 當時
에 便疑此冊
이 是仲宣所爲
라 及晉王爲太傅
에 臘日大會賓客
할새 語元茂子滿曰
尊君作魏公冊이 高妙하니 仲宣도 亦以爲不如라하니
7-10【
보補】
반원무潘元茂(
반욱潘勖)가
注+① ≪문장지文章志≫에 말하였다. “반욱潘勖은 자字가 원무元茂로, 진류陳留의 중도中都 사람인데,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후한後漢 헌제獻帝 때에 상서랑尙書郞이 되고, 동해상東海相으로 옮기려고 했는데, 부임지로 출발하기 전에 상서좌승尙書左丞에 제수되었으며, 〈상서좌승에 임명된 그해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을 지었는데,
注+② ≪후한서後漢書≫에 말하였다. 사람들이 ≪
서경書經≫의 문체인
와 풍격이 같다고 평가하였다. 반원무가 사망한 뒤에
왕중선王仲宣(
왕찬王粲)이
注+③ 왕찬王粲은 다른 곳에 보인다. 명성을 독차지하니 당시에는 줄곧 이 책명이 왕중선이 지은 문장일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진왕晉王(
문왕文王 사마소司馬昭)이 황제의
태부太傅가 되었을 때,
에 대규모로 빈객을 모아 회합하는 자리에서 반원무의 아들
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선친께서 지은 위공의 책명은 더할 나위 없이 오묘하니, 왕중선도 자신이 〈반원무만〉 못하다고 하였네.”
사람들이 그제야 이 문장은 반원무가 지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注+④ 〈위공魏公의 책명冊命은〉 문장이 길어서 싣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