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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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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恭 從會稽還注+① 周祗隆安記曰 “恭, 字孝伯, 太原晉陽人. 祖父蒙, 司徒左長史, 風流標望. 父蘊, 鎭軍將軍, 亦得世譽.” 恭别傳曰 “恭, 清廉貴峻, 志存格正, 起家著作郎, 歷丹陽尹․中書令, 出爲五州都督․前將軍․靑兗二州刺史.”하니 王大看之注+② 王忱, 小字佛大. 晉安帝紀曰 “忱, 字元達, 平北將軍坦之第四子也. 甚得名於當世. 與族子恭少相善, 齊聲見稱. 仕至荊州刺史.” 見其坐六尺簟하고 因語恭하되
卿東來 故應有此物이리니 可以一領오하니
恭無言하고 大去後 即擧所坐者하여 送之 既無餘席 便坐薦上하다 聞之하고 甚驚曰
吾本謂卿多 故求耳라하니
對曰
丈人不悉恭이니이다 作人이로이다하다
【頭註】
劉云 “無緊無要, 有識有度.”
又云 “謂只有一席, 無餘席也.”


1-52 왕공王恭회계會稽에서 돌아오자注+주지周祗의 ≪융안기隆安記≫에 말하였다. “왕공王恭은 자가 효백孝伯이고 태원太原 진양晉陽 사람이다. 조부 왕몽王蒙사도좌장사司徒左長史였는데 풍류風流로 이름이 높았다. 부친 왕온王蘊진군장군鎭軍將軍이었는데 그 역시 당대의 명성을 얻었다.”
왕공별전王恭别傳〉에 말하였다. “왕공은 청렴하고 고귀한 기품이 있고 세상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저작랑著作郞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단양윤丹陽尹중서령中書令을 지냈으며 외직에 나가 오주도독五州都督전장군前將軍청주자사靑州刺史연주자사兗州刺史를 지냈다.”
왕대王大(왕침王忱)가 그를 방문하였는데,注+왕침王忱은 어릴 적 불대佛大이다. ≪진안제기晉安帝紀≫에 말하였다. “왕침은 자가 원달元達이고 평북장군平北將軍 왕탄지王坦之의 넷째 아들이다. 당대에 매우 이름이 높았다. 친척 조카인 왕공王恭과 젊어서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함께 명성이 높았고 칭찬을 받았다. 벼슬이 형주자사荊州刺史에 이르렀다.” 그가 앉은 6자[]짜리 대자리를 보고는 왕공에게 말하였다.
“경이 나에게 하나 줄 수 있겠는가?”
왕공이 아무 말도 없다가 왕대가 가고 난 뒤 즉시 깔고 앉았던 대자리를 거둬 그에게 보냈다. 그리고는 여분의 자리가 없어 짚방석을 깔고 앉았다. 나중에 왕대가 듣고는 매우 놀라면서 말하였다.
“나는 실은 경이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달라고 한 것이네.”
왕공이 대답하였다.
장인丈人께서는 저를 잘 알지 못하시는군요. 저라는 사람은 여분의 물건이 없는 사람입니다.”
두주頭註
유진옹劉辰翁:긴요함은 없으나 식견과 도량이 있다.
유신옹劉辰翁:〈무장물無長物은〉 단지 대자리가 하나만 있고 여분의 대자리가 없음을 말한다.


역주
역주1 동쪽에서……것이니 : 동쪽은 대자리의 생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世說箋本≫)
역주2 : ‘給(주다)’과 같다.
역주3 長物 : ≪書叙指南≫에 媵物을 長物이라 하였다.(≪世說音釋≫)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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