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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補】
원미지元微之(
원진元稹)가
注+① 유후劉昫의 ≪구당서舊唐書≫ 〈원진열전元稹列傳〉에 말하였다. “원진은 자字가 미지微之로, 하남河南 사람이며, 〈북조北朝〉 북위北魏의 소성황제昭成皇帝의 후예이다. 부친 원관元寬은 비부낭중比部郞中을 역임하였다. 원진은 9세에도 문장을 잘 짓고, 15세에 28세에 에 응시했는데 재식겸무명어체용과才識兼茂明於體用科에서 원진이 수석을 차지하여 우습유右拾遺에 제수되었다. 〈당唐 목종穆宗〉 장경長慶 2년(822)에 평장사平章事에 제수되었다.”
계유공計有功의 ≪당시기사唐詩紀事≫에 말하였다. “당唐 목종穆宗 때에 빈어嬪御(시첩侍妾과 궁녀宮女)들이 대부분 원진이 지은 노래의 가사를 암송했으니, 궁중에서는 〈그를〉 원재자元才子라고 불렀다.” 유몽득劉夢得(
유우석劉禹錫)․
注+② 유후劉昫의 ≪구당서舊唐書≫ 〈유우석열전劉禹錫列傳〉에 말하였다. “유우석은 자字가 몽득夢得으로, 팽성彭城 사람이다. 조부 유운劉雲과 부친 유서劉溆는 대를 이어 유학儒學으로 칭송받았다. 유우석은 고문古文에 정통하고, 오언근체시를 잘 지으며, 문장도 역시 재주와 문채가 풍부하였다.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을 때 태자빈객太子賓客․비서감분사동도秘書監分司東都의 자리에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위초로韋楚老와
注+③ 계유공計有功의 ≪당시기사唐詩紀事≫에 말하였다. “위초로韋楚老는 〈당唐 목종穆宗〉 장경長慶 연간(821~824)에 진사進士가 되고, 습유拾遺의 자리에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더불어
의 집에 있으면서
注+④ 유후劉昫의 ≪구당서舊唐書≫ 〈백거이열전白居易列傳〉에 말하였다. “백거이는 자字가 낙천樂天으로, 태원太原 사람이며, 〈북조北朝〉 북제北齊의 오병상서五兵尙書 백건白建의 잉손仍孫(7대손)이다. 조부 백굉白鍠과 부친 백계경白季庚은 대를 이어 유학에 진력하였다. 백거이는 총명과 지혜가 매우 뛰어났다. 〈당唐 덕종德宗〉 정원貞元 14년(798)에 〈지공거知貢擧(진사시進士試 시험관)인〉 고정高郢이 〈그를〉 갑과甲科로 선발하여 교서랑校書郞을 제수하고, 〈헌종憲宗〉 원화元和 연간(806~820)에 집현전교리集賢殿校理가 되었다. 문장이 풍부하고 아름다우며 시에 더욱 정통했는데, 〈그가〉 지은 시는 풍간諷諫에 의미를 두어 시대의 병폐를 경계하고 정치의 부족한 점을 보충했기 때문에 사군자士君子들이 으뜸으로 삼았다. 종종 〈그의 시가〉 궁중에 흘러 들어가 알려졌는데, 장무황제章武皇帝(헌종)는 간언을 받아들이고 도리를 생각하며 정직한 말을 애타게 들으려 했기 때문에 한림원翰林院에 불러 들여 학사學士로 삼았다.” 각각 〈금릉에서 옛일을 회고하다〉라는 시를 지었다.
유몽득劉夢得이 먼저 시를 완성하자, 백부가 보고 말하였다.
원진元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