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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魏 문제文帝(
조비曹丕)가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이었을 때
임치후臨淄侯(
조식曹植)의 재주와 명성이 매우 뛰어나고 높았기에 적장자의 지위를 박탈하려는 논의가 몇 번 있었다.
注+① ≪삼국지三國志≫에 말했다. “진사왕陳思王 조식曹植은 건안建安 19년(214) 임치후臨淄侯로 옮겨 봉해졌다. 조식은 이미 뛰어난 재주로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데다가 정의丁儀, 정이丁廙, 양수楊脩 등이 보좌하여 거의 태자太子가 될 뻔하였다. 그러나 조식은 마음대로 행동하고 자신의 말과 행실을 꾸미지 않았다. 문제文帝가 술수로 〈조식을〉 막고 궁인宮人들이 좌우에서 문제를 위해 이야기하였으므로 〈문제가〉 후사로 정해졌다.” 조공曹公(
조조曹操)이 어느날
가후賈詡에게 물어보았는데
注+② ≪위략魏略≫에 말했다. “가후賈詡는 자字가 문화文和로 무위武威 고장姑臧 사람이다. 젊었을 때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한양漢陽의 염충閻忠만이 그를 남달리 여기고 가우에게는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의 뛰어남이 있다고 여겼다. 태조太祖(조조曹操)가 기주목冀州牧을 다스리면서 〈가우를〉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삼았다. 이때 문제는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이었고 임치후臨淄侯는 재주와 명성이 한창 대단하였는데 각자 당여黨與가 있었다. 적장자의 지위를 박탈하려는 논의가 있자 문제文帝가 사람을 시켜 가후에게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한 방법을 물어보니, 가후가 ‘원컨대 장군께서는 덕과 국량을 크게 하고 빈한한 선비의 학문을 몸소 실행하며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힘쓰면서 자식된 도리를 어기지 마십시오. 이와 같을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가후는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다. 조공이 물었다.
조조曹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