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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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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文 爲五官將時 臨淄侯才名甚盛하여 幾有奪嫡之議注+① 三國志曰 “陳思王植, 建安十九年, 徙封臨淄侯. 植旣以才見異, 而丁儀․丁廙․楊脩等爲之羽翼, 幾爲太子. 而植任性不自彫勵. 文帝御之以術, 宮人左右竝爲之說, 故定爲嗣.” 曹公 一日 諮於賈詡注+② 魏略曰 “賈詡, 字文和, 武威姑臧人也. 少時人莫知, 唯漢陽閻忠異之, 謂詡有良․平之奇. 太祖領冀州牧, 以爲太中大夫. 是時, 文帝爲五官將, 而臨淄侯才名方盛, 各有黨與, 有奪宗之議. 文帝使人問詡自固之術, 詡曰 ‘願將軍恢崇德度, 躬素士之業, 朝夕孜孜, 不子道. 如此而已.’”로되 詡黙然不對어늘 曹公
不對 何也
詡曰
屬有所思
何思
答曰
思袁本初․劉景升父子也라하니
於是 太子遂定注+③ 魏志曰 “紹愛少子尙, 欲以爲後而未顯. 審配․逢紀與辛評․郭圖等爭權, 配․紀與尙比, 評․圖與譚比. 紹卒, 配等奉尙代紹位. 譚至, 不得立. 由是譚․尙有隙. 太祖軍至西平, 譚․尙擧兵相攻, 皆敗走. 劉表及妻愛少子琮, 欲以爲後, 而蔡瑁ㆍ張允爲之支黨, 乃出長子琦爲江夏太守. 表死, 衆遂奉琮爲嗣, 琦與琮遂爲讎隙, 至於傾覆.”하다


19-4 문제文帝(조비曹丕)가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이었을 때 임치후臨淄侯(조식曹植)의 재주와 명성이 매우 뛰어나고 높았기에 적장자의 지위를 박탈하려는 논의가 몇 번 있었다.注+① ≪삼국지三國志≫에 말했다. “진사왕陳思王 조식曹植건안建安 19년(214) 임치후臨淄侯로 옮겨 봉해졌다. 조식은 이미 뛰어난 재주로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데다가 정의丁儀, 정이丁廙, 양수楊脩 등이 보좌하여 거의 태자太子가 될 뻔하였다. 그러나 조식은 마음대로 행동하고 자신의 말과 행실을 꾸미지 않았다. 문제文帝가 술수로 〈조식을〉 막고 궁인宮人들이 좌우에서 문제를 위해 이야기하였으므로 〈문제가〉 후사로 정해졌다.” 조공曹公(조조曹操)이 어느날 가후賈詡에게 물어보았는데注+② ≪위략魏略≫에 말했다. “가후賈詡문화文和무위武威 고장姑臧 사람이다. 젊었을 때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한양漢陽염충閻忠만이 그를 남달리 여기고 가우에게는 장량張良진평陳平의 뛰어남이 있다고 여겼다. 태조太祖(조조曹操)가 기주목冀州牧을 다스리면서 〈가우를〉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삼았다. 이때 문제는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이었고 임치후臨淄侯는 재주와 명성이 한창 대단하였는데 각자 당여黨與가 있었다. 적장자의 지위를 박탈하려는 논의가 있자 문제文帝가 사람을 시켜 가후에게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한 방법을 물어보니, 가후가 ‘원컨대 장군께서는 덕과 국량을 크게 하고 빈한한 선비의 학문을 몸소 실행하며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힘쓰면서 자식된 도리를 어기지 마십시오. 이와 같을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가후는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다. 조공이 물었다.
조조曹操조조曹操
“대답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가후가 말했다.
“마침 생각난 것이 있습니다.”
〈조공이〉 물었다.
“무슨 생각인가?”
〈가후가〉 대답했다.
이에 태자가 마침내 정해졌다.注+③ ≪위지魏志≫에 말했다. “원소袁紹는 작은아들 원상袁尙을 아껴 후계자로 삼고자 했으나 〈그 뜻이〉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심배審配, 봉기逢紀신평辛評, 곽도郭圖 등과 권력을 두고 다투었는데 심배와 봉기는 〈작은아들인〉 원상의 편에 서고 신평과 곽도는 〈큰아들인〉 원담袁譚의 편에 섰다. 원소가 죽자 심배 등이 원상을 받들어 원소의 지위를 대신하게 했다. 원담이 〈뒤늦게〉 도착했으나 부친의 뒤를 이을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원담과 원상 사이에 틈이 생겼다. 태조太祖(조조曹操)의 군대가 서평西平에 이르자 원담과 원상이 군대를 일으켜 〈조조의 군대를〉 공격했으나 모두 패주하고 말았다.
유표劉表와 그의 처는 작은아들 유종劉琮을 아껴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고 채모蔡瑁장윤張允은 유종의 패거리가 되어 마침내 큰아들 유기劉琦강하태수江夏太守로 내보냈다. 유표가 죽자 무리들이 드디어 유종을 후계자로 받들었다. 유기와 유종은 마침내 원수 사이가 되고 〈나라가〉 전복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역주
역주1 【補】 : 저본에는 ‘補’가 없으나, 이 일화는 ≪世說新語≫에는 실려 있지 않고 ≪何氏語林≫에 실려 있는 것에 의거하여 ‘補’자를 보충하였다.
역주2 袁本初(袁紹)와……생각했습니다 : 원소와 유표 모두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워 아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 결국 혼란을 초래하였다.
역주3 (遑)[違] : 저본에는 ‘遑’으로 되어 있으나, ≪世說新語≫와 ≪何氏語林≫에 의거하여 ‘違’로 바로잡았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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