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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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黄子琰 少即辯惠 建和中嘗日食 京師不見이라 子琰祖太尉 以狀聞한대 太后詔問所食多少어늘
太尉思其對 而未知所이라 子琰年七歲時在側이라가
何不言日食之餘 如月之初注+① 東觀漢記曰 “黄琬, 字子琰, 江夏安陸人. 琬少失父, 曾祖香․祖瓊, 竝有高名.” 後漢書曰 “瓊爲司徒, 琬以公孫拜童子郎. 時司空盛允有疾, 太尉遣子琰候問. 會江夏上蠻賊事, 允發書, 視畢微戱子琰曰 ‘江夏大邦, 而蠻多士少.’ 子琰奉手, 對曰‘蠻夷猾夏, 責在司空.’ 因拂衣辭去. 官至司徒․太尉. 與王允謀誅董卓, 不遂, 下獄死.”잇가
【頭註】
王云 “注恐誤. 子琰不下獄.”


22-4 황자염黄子琰(황완黄琬)은 어려서 언변이 뛰어나고 총명하였다. 건화建和(147~149) 연간에 한번은 일식日食이 있었는데 황자염의 조부 태위太尉(황경黃瓊)가 장계狀啓를 올려 보고하니, 태후太后조서詔書를 내려 일식의 정도가 어떠한 지 물었다.
태위가 대답할 말을 생각하였으나 어떻게 비유해야 할지 모르자, 당시 7세였던 자염이 곁에 있다가 말하였다.
“어찌하여 일식日食의 나머지가 달이 처음 생길 때의 모습과 같다고注+① ≪동관한기東觀漢記≫에 말하였다. “황완黄琬자염子琰이고, 강하江夏 안륙安陸 사람이다. 황완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고, 증조부 황향黃香과 조부 황경黃瓊은 모두 높은 명성을 지녔다.”
후한서後漢書≫ 〈황경전黄瓊傳〉에 말하였다. “〈조부〉 황경이 사도司徒가 되자 황완은 의 손자이므로 에 임명되었다. 당시 사공司空 이 병들어 태위(황경)가 자염을 보내 병문안을 하게 하였다. 마침 강하江夏에서 올린 만적蠻賊의 일에 대한 부본副本이 있었는데, 성윤이 문건을 열어 다 읽고 나서 자염을 은근히 놀리며 말하기를, ‘강하는 큰 지역인데 오랑캐가 많고 선비는 적구만.’이라고 하자, 자염이 손을 받들어 읍하며 대답하기를 ‘만이蠻夷중하中夏를 어지럽히는 것은 그 책임이 사공司空에게 있습니다.’라고 하고는 옷자락을 떨치며 하직하고 떠났다. 관직이 사도司徒태위太尉에 이르렀다. 왕윤王允과 함께 을 죽이기로 모의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하옥下獄되어 죽었다.”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두주頭註
왕세무王世懋가 틀린 것 같다. 자염子琰(황완黄琬)은 하옥되지 않았다.


역주
역주1 【補】 : 저본에는 ‘補’가 없으나, 이 일화는 ≪世說新語≫가 아닌 ≪何氏語林≫에 실려 있는 것에 의거하여 ‘補’를 보충하였다.
역주2 수도에서……못하였다 : ≪後漢書≫ 〈五行志〉에 “桓帝 建和 元年 正月 辛亥日에 日蝕이 있었는데, 營室星 3度에서 일어나 史官이 그 현상을 보지 못하여 郡國이 狀聞하였다. 이때 梁太后가 攝政중이었다.[桓帝建和元年正月辛亥朔 日有蝕之 在營室三度 史官不見 郡國以聞 是時梁太后攝政]”라는 기록이 있다.
역주3 童子郎 : 公卿의 자식을 불러 들여 諸生으로 삼고 그 중 志操가 있는 자를 기록하여 동자랑으로 삼았다.(≪世說音釋≫)
역주4 盛允 : 字는 伯世이고 梁国 虞縣 사람이다. 東汉 桓帝 때 黄瓊이 太尉, 祝恬이 司徒, 盛允이 司空에 임명되었다.(≪後漢書≫ 〈孝桓帝纪〉)
역주5 董卓 : ?~192. 後漢 말의 武將으로 字는 仲穎이며 凉州 臨洮縣 사람이다. 변방에서 무공을 쌓아 靈帝 사후 十常侍의 난 등 정치적 혼란을 틈타 정권을 잡았다. 少帝를 폐하고 온갖 폭정을 휘둘러 관리들의 대규모 무장 항명사태인 反동탁연합군이 결성되었고 수차 암살 시도가 있었으며 결국 王允․呂布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역주6 : ‘比’의 뜻이다.(≪世說音釋≫)
역주7 副府 : 上書의 副本을 司空府에 보낸 것을 말한다.(≪世說音釋≫)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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