黄子琰은 少即辯惠라 建和中嘗日食에 京師不見이라 子琰祖太尉가 以狀聞한대 太后詔問所食多少어늘
太尉思其對
나 而未知所
이라 子琰年七歲時在側
이라가 曰
何不言日食之餘 如月之初
注+① 東觀漢記曰 “黄琬, 字子琰, 江夏安陸人. 琬少失父, 曾祖香․祖瓊, 竝有高名.” 後漢書曰 “瓊爲司徒, 琬以公孫拜童子郎. 時司空盛允有疾, 太尉遣子琰候問. 會江夏上蠻賊事, 允發書, 視畢微戱子琰曰 ‘江夏大邦, 而蠻多士少.’ 子琰奉手, 對曰‘蠻夷猾夏, 責在司空.’ 因拂衣辭去. 官至司徒․太尉. 與王允謀誅董卓, 不遂, 下獄死.”잇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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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염黄子琰(
황완黄琬)은 어려서 언변이 뛰어나고 총명하였다.
건화建和(147~149) 연간에 한번은
일식日食이 있었는데
황자염의 조부
태위太尉(
황경黃瓊)가
장계狀啓를 올려 보고하니,
태후太后가
조서詔書를 내려 일식의 정도가 어떠한 지 물었다.
태위가 대답할 말을 생각하였으나 어떻게 비유해야 할지 모르자, 당시 7세였던 자염이 곁에 있다가 말하였다.
“어찌하여
일식日食의 나머지가 달이 처음 생길 때의 모습과 같다고
注+① ≪동관한기東觀漢記≫에 말하였다. “황완黄琬은 자字가 자염子琰이고, 강하江夏 안륙安陸 사람이다. 황완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고, 증조부 황향黃香과 조부 황경黃瓊은 모두 높은 명성을 지녔다.”
≪후한서後漢書≫ 〈황경전黄瓊傳〉에 말하였다. “〈조부〉 황경이 사도司徒가 되자 황완은 공公의 손자이므로 에 임명되었다. 당시 사공司空 이 병들어 태위(황경)가 자염을 보내 병문안을 하게 하였다. 마침 강하江夏에서 올린 만적蠻賊의 일에 대한 부본副本이 있었는데, 성윤이 문건을 열어 다 읽고 나서 자염을 은근히 놀리며 말하기를, ‘강하는 큰 지역인데 오랑캐가 많고 선비는 적구만.’이라고 하자, 자염이 손을 받들어 읍하며 대답하기를 ‘만이蠻夷가 중하中夏를 어지럽히는 것은 그 책임이 사공司空에게 있습니다.’라고 하고는 옷자락을 떨치며 하직하고 떠났다. 관직이 사도司徒․태위太尉에 이르렀다. 왕윤王允과 함께 을 죽이기로 모의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하옥下獄되어 죽었다.”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注
◦ 왕세무王世懋:주注가 틀린 것 같다. 자염子琰(황완黄琬)은 하옥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