諸葛武侯
注+① 蜀志曰 “諸葛亮, 字孔明, 瑯琊陽都人. 父珪, 字君貢, 泰山郡丞. 亮早孤, 躬耕隴畝, 好爲梁父吟, 身長八尺. 每自比管仲․樂毅, 時人莫之許也, 唯博陵崔州平․(頴)[潁]川徐元直, 謂爲信然. 先主屯新野, 徐庶見先主曰 ‘諸葛孔明, 臥龍也, 將軍豈願見之乎?’ 先主曰 ‘君與俱來.’ 庶曰 ‘此人, 可就見, 不可屈致也.’ 先主遂詣亮, 謂關羽․張飛曰 ‘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累遷丞相․益州牧, 率衆北征, 卒于渭南.”가 與司馬宣王
注+② 晉紀曰 “司馬懿, 字仲達, 河內溫人. 猜忌多權數. 魏武聞其有狼顧相, 召使前行, 令反顧, 面正向後, 而身不動. 又嘗夢三馬同食一槽, 甚惡焉, 謂太子丕曰 ‘司馬懿, 非人臣也, 必與汝家事.’ 太子素與帝善, 每相全佑.” 聖賢群輔錄曰 “河內司馬懿仲達․潁川陳群長文․譙朱鑠彦才․濟陰吳質季重, 爲魏文帝四友.”으로 治軍渭濱
하고 克日交戰
할새 宣王
이 戎服蒞事
하고 使人視武侯
한대 獨乘素輿
하고 葛巾毛扇
으로 指麾三軍
에 隨其進止
하니 宣王歎曰
12-2 【
보補】
제갈무후諸葛武侯(
제갈량諸葛亮)가
注+①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제갈량전諸葛亮傳〉에 말하였다. “제갈양은 자字가 공명孔明으로, 낭야瑯琊 양도陽都 사람이다. 부친 제갈규諸葛珪는 자字가 군공君貢으로, 태산군승泰山郡丞을 역임하였다. 제갈양은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몸소 농토를 경작하며, 을 즐겨 읊고 키는 8척이었다. 매번 자신을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에 비유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인정해주지 않았으나, 오직 박릉博陵의 과 영천潁川의 만은 정말 그렇다고 하였다. 선주先主(유비劉備)가 신야新野에 주둔하고 있을 때, 서서가 선주를 뵙고 ‘제갈공명은 와룡臥龍이니, 장군께서는 어찌 그를 만나려 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선주가 ‘당신이 그와 함께 오시오.’ 하였다. 서서가 ‘이 사람은 찾아가 만날 수는 있어도 욕되게 불러올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선주가 마침내 제갈양을 찾아가 〈만난〉 뒤에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에게 ‘나에게 공명이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네.’ 하였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승상丞相과 익주목益州牧이 되었고, 군대를 통솔하여 북쪽 위魏나라를 정벌하다가 위수渭水 남쪽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마선왕司馬宣王(
사마의司馬懿)과
注+② 간보干寶의 ≪진기晉紀≫에 말하였다. “사마의司馬懿는 자字가 중달仲達로, 하내河內 온溫 사람이다. 〈타인을〉 의심하고 미워하며 권모술수가 많았다. 위魏(삼국三國)나라 무제武帝(조조曹操)는 그에게 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불러 앞으로 걸어가게 하다가 뒤를 돌아보게 하자, 얼굴이 똑바로 뒤를 향한 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또 〈무제가〉 한 번은 이 하나의 구유에서 함께 꼴을 먹는 꿈을 꾸고는 매우 불쾌하여 태자太子 조비曹丕에게 ‘사마의는 남의 신하가 될 자가 아니니, 틀림없이 ’ 하였다. 태자는 평소에 선제宣帝(사마의)와 사이가 좋아서 〈그가 위험할 때마다〉 매번 보호하고 도와주었다.”
에 말하였다. “하내河內의 중달 사마의, 영천潁川의 장문長文 진군陳群, 초군譙郡의 언재彦才 , 제음濟陰의 계중季重 이 위魏(삼국三國) 문제文帝(조비曹丕)의 사우四友(네 명의 사우師友)이다.” 더불어
위수渭水 가에서 군대를 정돈하고 날짜를 약속하여 교전하였다. 사마선왕이 갑옷을 입은 채 전투에 임하고 사람을 시켜 제갈무후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제갈무후는〉 홀로 흰 수레를 탄 채
갈건葛巾을 머리에 두르고
백우선白羽扇을 들고서
을 지휘하니 〈삼군은〉 나아가고 멈추기를 〈그의 지휘에〉 따랐다. 사마선왕이 감탄하면서 말하였다.
제갈량諸葛亮
“제갈군諸葛君(제갈무후)은 명사名士라고 할 만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