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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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紀僧眞 得幸於齊世祖러니 嘗請曰
出自本縣武吏어늘 邀逢聖時하여 階榮至此注+① 南史曰 “紀僧眞, 建康人也. 少事蕭惠開, 惠開密謂曰 ‘我子弟竝無異才, 政是蕭道成耳.’ 僧眞乃請事齊高帝, 備見親信. 嘗令學上手迹, 報答書疏, 皆付之. 僧眞容貌言吐, 雅有士風. 武帝嘗目送之, 笑曰 ‘人生何必計門戶, 紀僧眞, 貴人所不及也.’”하니 無復所須 惟就陛下乞作士大夫하니이다하니
上曰
由江斅注+② 別見.注+③ 南史曰 “(𤅢)[瀹], 字義潔, 陳郡人, 謝莊子也. 仕至太子詹事.”이니 我不得措意 可自詣之하라하다
僧眞 承旨詣斅하여 登榻坐定한대 顧命左右曰
移吾牀遠客하라하다
僧眞 喪氣而退하여 以告世祖하니 世祖曰
士大夫 故非天子所命이라하다


11-38 【기승진紀僧眞이 〈남조南朝 세조世祖(무제武帝)에게 총애를 받았는데, 한번은 부탁을 하였다.
“저는 본현本縣의 무관 출신인데, 성스러운 시대를 만나 이처럼 고위직에 올랐으니注+① ≪남사南史≫ 〈기승진열전紀僧眞列傳〉에 말하였다. “기승진은 건강建康 사람이다. 젊은 시절 를 섬겼는데, 소혜개가 그에게 은밀히 ‘나의 자제들은 모두 남다른 재주가 없으니, 〈인물이라면〉 바로 소도성蕭道成일 뿐일세.’ 하였다. 기승진은 이에 〈남조南朝나라 고제高帝(소도성)를 섬기기를 청하여 크게 친애와 신임을 받았다. 한번은 〈고제가 그에게〉 자신의 필체를 모방하여 상소문에 답하게 하였는데, 모두 일치하였다. 기승진은 용모와 말투에 평소 선비의 풍모가 있었다. 〈고제의 맏아들〉 무제武帝(소색蕭賾)가 한번은 눈짓으로 전송하고는 웃으면서 ‘인생에서 어찌 굳이 가문을 따지겠는가. 기승진의 당당함은 현달한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하였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폐하께 애걸하니, 사대부士大夫가 되도록 해주십시오.”
임금이 말하였다.
“이는 강효江斅注+② 〈강효江斅는〉 따로 보인다. 사약謝瀹注+③ ≪남사南史≫ 〈사약열전謝瀹列傳〉에 말하였다. “사약은 의결義潔로, 진군陳郡 사람이며, 의 아들이다. 관직이 태자첨사太子詹事에 이르렀다.” 통해야 하니, 내가 신경을 쓸 수가 없소. 스스로 그들을 찾아가도록 하시오.”
기승진이 성지聖旨를 받들어 강효를 찾아가 평상에 올라 자리를 잡자, 강효가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나의 평상을 옮겨 손님과 멀게 하라.”
기승진이 기가 꺾인 채 물러나 세조에게 아뢰니, 세조가 말하였다.
“사대부는 본래 천자가 명령할 바가 아니오.”


역주
역주1 蕭惠開 : 423~471. 南蘭陵 사람으로, 南朝 宋나라 外戚인 蕭思話의 맏아들이다. 文帝 때 秘書郞․尙書水部郞․南徐州治中從事史․中書侍郞 등을 역임하였다.
역주2 謝莊 : 421~466. 陳郡 陽夏 사람으로, 字는 希逸이다. 謝弘微의 아들이자 謝靈運의 族侄인데 ≪月賦≫로 명성을 얻었고, 南朝 宋 文帝․孝武帝․明帝를 섬기고 관직이 中書令에 이르렀다.
역주3 (常常)[堂堂] : 저본에는 ‘常常’으로 되어 있으나, ≪南史≫ 〈紀僧眞列傳〉에 의거하여 ‘堂堂’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𤅢)[瀹] : 저본에는 ‘𤅢’으로 되어 있으나, ≪南齊書≫ 〈謝瀹列傳〉에 의거하여 ‘瀹’으로 바로잡았고, 아래도 같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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