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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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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空 在北府할새 桓宣武惡其居兵權이라注+① 南徐州記曰 “徐州人多勁悍, 號精兵. 故桓溫常曰‘京口酒可飲, 箕可用, 兵可使.’” (郄)[郗]於事機素暗하여 遣牋詣桓호대
方欲共獎王室하여 修復園陵이라
嘉賓 出行이라가 於道上聞信至하고 急取牋視竟 寸寸毀裂하고 便回還更作牋自陳호대
老病 不堪人間하니 欲乞閑地自養하노이다하니
宣武得牋大喜하고 即詔轉公督五郡會稽太守하다注+② 晉陽秋曰 “大司馬將討慕容暐, 表求申勸平北愔及袁真等. 愔以羸疾求退, 詔大司馬領愔所任.” 按中興書, 愔辭此行, 溫責其不從, 轉授會稽. 世說爲謬.
【頭註】
劉云 “此等後人不能亮也, 哀哉!”
劉云 “嘉賓入幕, 豈得已哉! 視其處父子間, 有足取者.”


21-6 치사공郗司空(치음郗愔)이 에 있을 때 환선무桓宣武(환온桓溫)는 치사공이 병권兵權을 차지한 것을 싫어하였다.注+에 말하였다. “서주徐州 사람들은 대부분 굳세고 거칠어 ‘정병精兵’으로 불렸다. 그러므로 환온桓溫은 ‘경구京口의 술은 마실 만하고 키[]는 쓸 만하며 병사는 부릴 만하다.’라고 늘 말하곤 하였다.” 치사공은 본래 일의 기미를 알아차리는데 어두워서 환선무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앞으로 함께 왕실을 장려하여 합니다.”
길에서 〈부친의〉 사자使者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는 급히 편지를 가져다 다 읽고 난 뒤 북북 찢어버리고는 곧바로 돌아가 〈부친 대신〉 다시 편지를 써서 이렇게 말하였다.
“늙고 병든 저는 인사人事를 감당하지 못하겠으니 한가로운 땅에서 저 자신을 보양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환선무가 편지를 받고 크게 기뻐하고는, 즉시 조서를 내려 로 임명하였다.注+② ≪에 말하였다. “대사마大司馬(환온桓溫)가 장차 모용위慕容暐를 토벌하려 할 때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평북장군平北將軍 치음郗愔원진袁真 등에게 〈출정하기 위한〉 행장을 꾸리도록 거듭 돈유해줄 것을 청하였다. 〈그런데〉 치음이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물러나기를 구하니, 〈황제가〉 대사마에게 조서를 내려 치음이 맡았던 일을 맡게 하였다.”
〈유효표가〉 살펴보니, 에는 치음이 출정하지 않으려 하자 환온은 그가 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계태수로 옮겨 제수하였다고 하였으니, ≪세설신어≫가 틀렸다.
두주頭註
유진옹劉辰翁:〈환온이〉 슬프다.
유신옹劉辰翁:〈환온이〉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가 부자간父子間에 처신한 것을 보니 충분히 취할 만한 점이 있다.


역주
역주1 北府 : 京口를 말한다. 東晉은 建康을 수도로 하고 京口를 北府, 歷陽을 西府, 姑熟을 南府로 삼았다.(≪世說音釋≫) 太和 2년(367)에 郗愔은 平北將軍에 임명되어 京口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경구는 수도인 건강과 가까이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桓溫은 그가 평북장군에 임명된 것을 싫어하였다.(≪晉書≫ 〈郗愔傳〉)
역주2 ≪南徐州記≫ : ≪隋書≫ 〈經籍志〉에 따르면, 2권이며 南朝 宋山謙이 편찬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逸失되었다. 南徐州는 劉宋이 북방에 있던 서주를 남쪽 京口에 설치하면서 구별하기 위해 ‘南’자를 붙인 지명이다.(≪史通≫ 〈書志〉)
역주3 園陵을 수복하고자 : 晉나라는 본래 洛陽에 수도를 두고 있었으나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남쪽으로 쫓겨 내려가 建康으로 수도를 옮겼다. 여기서 園陵은 북쪽에 남겨두고 온 선대 황실의 陵廟를 말하며, 이를 수복하자는 것은 北伐을 추진하여 잃어버린 국토를 회복하자는 의미이다.
역주4 世子……출행하였다가 : 郗超는 郗愔의 長子인데, 이때 大司馬 桓溫의 參軍으로 있었다.
역주5 5개……會稽太守 : 五郡은 會稽․臨海․東陽․永嘉․新安이다. 회계태수로 회계에 머물면서 江東의 5개 郡의 군사를 지휘하는 도독을 말한다. 會稽太守都督五郡軍事 또는 會稽内史鎮軍大將軍都督浙江東五郡諸軍事라고도 한다.(≪太平御覽≫ 권595, ≪資治通鑑≫ 〈晉紀〉)
역주6 陽秋 : ≪續晉陽秋≫라고도 하였다. 宋(南朝) 檀道鸞이 20권으로 편찬하였으며, 東晉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원본은 산실되었고, 黄奭이 ≪世說新語≫, ≪文選≫ 등의 注에서 80 여인의 사적을 수집하여 만든 輯本이 있다. 檀道鸞은 字가 萬安이며, 高平(지금의 山東省) 金鄕 사람으로, 관직이 永嘉太守에 이르렀다.
역주7 中興書 : 宋(南朝)나라 사람 何法盛이 편찬하였고, 東晉의 事跡을 기록한 紀傳體 史書이다. ≪晉中興書≫라고도 하며 78권이다. 何法盛은 宋 孝武帝때 奉朝請․校書東宫을 지냈다. 李延壽의 ≪南史≫에서는 이 책의 편찬자가 하법성이 아니라 郗紹라고 하였다.
역주8 (郄)[郗] : 저본에는 ‘郄(극)’으로 되어 있으나, ≪李卓吾批點世說新語補≫(安永本) 등에 의거하여 ‘郗(치)’로 바로잡았다. 이하도 같다.
역주9 世子 : ≪初學記≫에 “漢나라 제도에 天子의 嫡室 자식은 ‘皇太子’라 하고, 諸侯王의 적실 자식은 ‘世子’라 한다.”라 하였는데, 후대에 모두 이를 답습하였다.
역주10 嚴辦 : ‘행장을 꾸리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嚴’은 ‘裝’과 같고, 명제의 이름(劉莊)을 피하기 위해 바꿔 쓴 것이다.
역주11 이러한……못하였으니 : 郗超는 桓温의 谋主로 있을 때, 환온에게 황제를 폐위시키고 위력을 떨칠 것을 권하였으나, 환온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제 3차 북벌 때 크게 패하여 돌아갔다. 여기서는 환온이 치초를 신뢰하지 않아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두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역주12 郗嘉賓(郗超)을……들이지 : 謝安이 桓溫을 찾아왔을 때 환온이 자신의 참모인 郗超에게 장막 속에 들어와 엿듣도록 하였는데, 마침 바람이 불어와 장막이 날아가 치초의 모습이 드러나자 사안이 웃으면서 “치생은 入幕賓이라 해야겠군요.[郗生可謂入幕之賓矣]”라고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로 機密에 참여하는 幕僚를 일컬어 ‘입막빈’이라 한다.(≪晉書≫ 〈郗超傳〉)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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