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류가 평민이었을 때 나를 방문하면 내가 문 밖을 나가지 않고서 맞이하고 전송하였으며 대접한 음식도 소금과 채소에 불과하였는데, 지금 전송하러 나간다면 이는 성양태수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양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니 내 마음이 편안치 않다.”
注+② 에 말하였다. “7살 되던 해 봄에 내 키가 3자 4치였는데 경서와 역사를 터득하지 못하였고 종조고從祖姑의 아들인 양류梁柳와 함께 가시나무를 엮고 억새를 잡고서 진陳(진陣)을 나누어 서로 찌르며 같이 놀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