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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개衛玠가
예장豫章으로부터
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의 명성을 들어왔던 터라 만나러 오는 자들이 담장을 둘러친 것처럼 많았다. 위개는 이전부터 병약했기 때문에 몸이 피로를 견디지 못하여 마침내 병이 들어 죽으니, 당시 사람들은 “구경꾼들이 위개를 죽였다.”고 하였다.
注+① 〈위개별전衛玠別傳〉에 말하였다. “위개衛玠는 여러 사람들 속에 있으면 진실로 남다른 자태가 있었다. 때에 낙양洛陽의 시가지에 를 타고 가면 〈사람들이〉 모두 ‘누구 집안의 벽인璧人(옥인玉人)인가?’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가문과 고을에서 〈그를〉 벽인이라고 불렀다.”注+② 살펴보건대, ≪영가류인명永嘉流人名≫에 “위개는 영가永嘉 6년(312) 5월 6일에 예장豫章에 이르렀고, 그해 6월 20일에 죽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다면 위개가 남쪽으로 예장에 온 뒤 45일 동안에 어찌 하도下都에 갔다가 〈돌아와〉 죽을 겨를이 있었겠는가. 또한 여러 책에서 모두 위개는 예장에서 죽었다고 하였지, 하도에서 죽었다고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