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臨川王義慶이 采擷漢晉以來佳事佳話하여 爲世說新語한대 極爲精絕이나 而猶未爲奇也라 梁劉孝標가 注此書하니 引援詳確하여 有不言之妙라
如引漢魏吳諸史及子傳地理之書
는 皆不必言
이어니와 只如晉氏一朝史及晉諸公列傳譜錄文章
가 皆出於正史之外
하여 記載特詳
하고 聞見未接
하니 寔爲注書之法
이라注+① 右는 見高氏緯略이라
右는 世說三十六篇이라 世所傳을 釐爲十卷이어나 或作四十五篇이로대 而末卷은 但重出前九卷中所載라 余家舊藏은 盖得之王原叔家한대 後得晏元獻公手自校本하여 盡去重復하고 其注亦小加剪截하여 最爲善本이라
晉人은 雅尙清談한대 唐初史臣修書에 率意竄定하여 多非舊語로대 尙賴此書하여 以傳後世라 然字有譌舛하고 語有難解하여 以它書로 證之하여 間有可是正處하고 而注亦比晏本에 時爲增損이로대 至於所疑하여는 則不敢妄下雌黃하고 姑亦傳疑하여 以竢通博하노라
郡中에 舊有南史와 劉賓客集版한대 皆廢于火하고 世說亦不復在라 游到官하여 始重刻之하여 以存故事라 世說이 最後成하여 因併識于卷末하노라 淳熙戊申重五日에 新定郡守笠澤陸游가 書하다
≪세설신어世說新語≫ 구제舊題 1수 구발舊跋 2수
유송劉宋의 임천왕臨川王 유의경劉義慶이 한漢나라와 진晉나라 이후의 뛰어난 일화와 담론을 채집하여 ≪세설신어≫를 편찬하였는데 지극히 정묘하고 빼어났으나 그래도 진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양梁나라의 유효표劉孝標(유준劉峻)가 이 책에 주注를 다니 인용한 것이 상세하고 정확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미가 생겼다.
이를테면
한漢․
위魏․
오吳나라의
사서史書 및
열전列傳․
지리서地理書에서 인용한 것은 모두 말할 것도 없고, 단지
진대晉代 한 시대의 사서와 진나라 인물들의 열전․
보록譜錄의 문장 무려 166종과 같은 경우는 모두
정사正史 이외에서 나와 기술이 특히 상세하고 듣도 보도 못한 내용이었으니, 이것이
주서注書하는 법이 되었다.
注+① 이상은 고씨高氏(고사손高似孫)의 ≪위략緯略≫에 보인다.
이상은 ≪세설신어≫ 36편이다. 세상에 전해지는 것을 10권으로 정리하였거나 혹은 45편으로 만들기도 하였으나 마지막 권은 단지 앞부분의 9권에 실린 것이 중복하여 나온다. 우리 집안에 오래 간직해온 것은
집안에서 얻었는데, 나중에
이 손수 교감한 본을 얻어 중복된 것을 모두 제거하고 주석 또한 조금 깎아내어 가장
선본善本이 되었다.
진晉나라 사람들은 평소에 청담淸談을 숭상하였는데, 당唐나라 초기에 사신史臣이 사서史書를 편찬할 때 멋대로 고쳐서 옛날의 말이 아닌 것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 책에 힘입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글자 중에는 잘못된 것도 있고 담론 중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어 다른 서적으로 증험하여 간간이 바로잡아야 했던 곳도 있고, 주注 또한 안수본晏殊本에 비하여 때때로 증감하기도 하였다. 의심스런 부분에 대해서는 감히 마음대로 교감하지 않고 일단 의심나는 대로 전하여 박학다식한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리노라.
소흥紹興 8년(1138) 여름 4월
계해일癸亥日 광천廣川의
이 쓰다.
예전에
군郡 안에 ≪
남사南史≫와
각판刻板이 있었는데 모두 불에 타 없어졌고 ≪세설신어≫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부임하여 비로소 다시 판각하여
고사故事를 보존하였다. ≪세설신어≫가 가장 나중에 완성되어 그 참에 권말에 아울러서 기록한다.
순희淳熙 무신년戊申年(1188) 5월 5일에
군수郡守 육유陸游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