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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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蕭穎士注+撰穎士文集序曰 “蘭陵蕭穎士, 字茂挺. 十九進士擢第, 淮南連帥表爲揚州功曹. 君以文章制度爲己任, 時人咸以此許之. 及卒, 門人諡爲文元先生.”注+唐詩紀事曰 “穎士以拔獎後進爲任, 如李陽冰․皇甫冉․陸渭, 皆由獎目爲名士. 天下推知人稱 ‘蕭功曹, 與李華齊名.’ 世號蕭李.” 有一僕한대 事之十餘年이어늘 每加箠楚 輒百餘하니 不堪其苦 或激之使去하면 其僕曰
我非不能他從이나 所以遲留者 特愛慕其博奧耳注+② 李冗獨異志曰 “穎士常使一傭僕, 名杜亮.”니이다하다


26-17 【소영사蕭穎士에게注+이화李華가 찬술한 〈영사문집서穎士文集序〉에 말하였다. “난릉蘭陵 사람 소영사蕭穎士무정茂挺이다. 19세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가 표문을 올려 〈재상 최원崔圓이〉 양주공조揚州功曹로 삼았다. 소군蕭君(소영사)은 문장과 제도를 자기의 임무로 삼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인정하였다. 세상을 떠났을 때 문인들이 문원선생文元先生이라는 시호를 지었다.”注+에 말하였다. “소영사蕭穎士는 후생을 발탁하고 격려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니, 와 같은 사람들이 모두 〈그의〉 장려와 품평을 통해 명사가 되었다. 천하 사람들이 〈그에 대해〉 사람을 잘 알아본다고 추중推重하여 ‘소공조는 이화李華와 명성이 나란하다.’라고 칭찬하였고, 세상에서는 소리蕭李라고 일컬었다.” 하인 한 명이 있었는데, 〈그는〉 소영사를 10여 년 동안 섬겼으나, 〈소영사는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번번이 100여 대를 때리니 〈그는〉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 사람들이 간혹 그에게 〈소영사를〉 떠나도록 격동시키면 그 하인이 말하였다.
“제가 다른 분을 따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머물러 있는 이유는 그의 광대하고 심오한 학식을 매우 흠모하기 때문입니다.”注+에 말하였다. “소영사蕭穎士는 항상 하인 한 명을 부렸는데, 〈그의〉 이름은 두량杜亮이다.”


역주
역주1 淮南連帥 : 淮南節度使이다. ‘연수’는 본래 周나라의 제도로, 十國을 ‘連’이라고 하고 그 우두머리를 ‘帥’라고 했었는데, 漢나라 때에는 太守를, 이후에는 按察使나 節度使 등을 지칭하게 되었다.
역주2 計有功의 ≪唐詩紀事≫ : 허유공은 北宋 衡陽郡 安仁縣 사람으로, 字는 敏夫, 호는 灌園居士이다. 徽宗 宣和 2년(1120)에 진사에 합격하고, 高宗 紹興 5년(1135)에 右承議郎으로서 簡州의 장관이 되며, 提擧兩浙西路常平茶鹽公事가 되었다. ≪당시기사≫는 당나라 시인 1,150명에 대해 그들의 세계․고향․시와 사적 및 평론을 수록한 책이다. 南宋 寧宗 嘉定 17년(1224)에 王禧가 판각한 것이 현재 확인되는 최초 판본이고, 1989년에 王仲镛이 ≪唐诗紀事校箋≫을 출판하였다.
역주3 李陽冰 : 唐 譙郡사람으로, 字는 少溫이며, 篆書에 뛰어났다. 縉雲縣令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當塗縣令이 되었는데, 이때 李白이 가서 의지하면서 〈當塗李宰君畫讚〉을 지어 “진운현에서는 명성을 날리고 당도현에서는 정사가 완성되었네.[縉雲飛聲 當塗政成]”라고 하였다. 國子監丞과 集賢院學士를 역임하고, 將作少監이 되었기 때문에 韓愈는 그를 李監이라고 불렀다.
역주4 皇甫冉 : 716~769. 唐 潤州 丹陽縣 사람으로, 字는 茂政이다. 魏晉시대 晉의 명사 皇甫謐의 후손으로, 10세에 문장을 잘 지어 張九齡이 매우 중시하여 小友라고 불렀다. 玄宗 天寶 15년(756)에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無錫尉에 임명되었다. 이후에 左拾遺와 右補闕이 되었다. 그의 아우 皇甫曾과 함께 모두 시에 뛰어났다.
역주5 陸渭 : 字는 長源이다.(≪世說箋本≫)
역주6 李(冗)[亢] : 저본에는 ‘冗’으로 되어 있으나, 인명으로서 ‘亢’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 ≪獨異志≫ : 唐의 李亢이 신화나 일사를 기록한 책으로, 본래 10권인데 일실되어 3권만 현존한다. 찬술자의 이름이 ≪新唐書≫ 〈藝文志〉와 ≪宋史≫ 〈藝文志〉에는 李亢, ≪崇文總目≫과 ≪通志≫ 〈藝文略〉에는 李元, 明나라 抄本에는 李冗(이용), ≪四庫全書≫에는 李冘(이유)라고 되어 있다.
역주8 李華 : 714~774. 唐 趙州 贊皇縣 사람으로, 字는 叔文․遐叔이다. 문장이 뛰어나 蕭穎士와 명성을 나란히 하였으니, 이 둘은 당나라 최초의 고문운동가이다. 玄宗 開元 23년(735)에 진사에 합격하고, 秘書省校書郎․監察御史․右補闕 등을 역임했다. 安史의 반란 때 반란군의 협박을 받아 鳳閣舍人이 되고, 반란이 평정된 뒤에 이 때문에 杭州司戶參軍으로 좌천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직했다. 肅宗 때에 左補闕․司封員外郎에 임명되었는데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대표작으로 〈弔古戰場文〉이 있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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