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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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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嶠 爲武帝所親重이러니 語嶠曰
東宮 頃似更成進하니 卿試往看하라하고
何如오하니
答曰
皇太子 聖質如初注+① 干寶晉紀曰 “皇太子有醇古之風, 美於信受. 侍中和嶠, 數言於上曰 ‘季世多僞, 而太子尙信, 非四海之主. 憂太子不了陛下家事, 願追思文武之阼.’ 上旣重長適, 又懷齊王朋黨之論, 弗入也. 後上謂嶠曰 ‘太子近入朝, 吾謂差進, 卿可與荀侍中共往言.’ 及顗奉詔還, 對上曰 ‘太子, 明識弘新, 有如明詔.’ 問嶠, 嶠對曰 ‘聖質如初.’ 上默然. 晉陽秋曰 “世祖疑惠帝不可承繼大業, 遣和嶠ㆍ荀勗往觀察之. 旣見, 勗稱歎曰 ‘太子, 德更進茂, 不同於故.’ 嶠曰 ‘皇太子, 聖質如初. 此陛下家事, 非臣所盡.’ 天下聞之, 莫不稱嶠爲忠, 而欲灰滅勗也.” 按, 荀顗淸雅, 性不阿諛, 校之二說, 則孫盛爲得也.니이다하다
【頭註】
王云 “荀顗, 亦未可保.”


10-15 무제武帝(사마염司馬炎)에게 친애와 존중을 받아 왔는데, 〈무제가〉 화교에게 물었다.
동궁東宮(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이 근래에 더 진보한 듯하니, 그대가 한 번 가서 살펴보시오.”
〈화교가 동궁을 보고〉 돌아오자, 〈무제가〉 물었다.
“어떻소?”
〈화교가〉 대답하였다.
“황태자는 자질이 처음과 같습니다.”注+간보干寶의 ≪진기晉紀≫에 말하였다. “황태자(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는 순박하고 고풍스러운 풍모를 지녔고 〈타인의 말을 의심 없이〉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훌륭하게 여겼다. 시중侍中 화교和嶠가 자주 임금(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에게 ‘말세에는 거짓이 많은데 태자는 믿음만 숭상하니 사해四海의 주인이 아닐 것입니다. 태자가 폐하의 집안일(왕업)을 완수하지 못할까 우려되니, 위로 을 생각하소서.’ 아뢰었다. 주상은 이미 적장자를 중시하였고, 또 제왕齊王(사마염의 동모제同母弟이 패거리를 짓는다는 여론을 생각했기 때문에 〈화교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에 임금이 화교에게 ‘태자가 근래에 조정에 들어왔는데, 내 생각에 조금 진보한 것 같으니, 그대가 순시중荀侍中(순의荀顗)과 함께 가서 대화를 나누어 보시오.’ 순의가 명을 받들어 갔다가 돌아와서는 임금에게 ‘태자는 고명한 식견이 넓고 참신해졌으니, 성상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점이 있었습니다.’ 아뢰었다. 화교에게 물으니, 화교는 ‘태자의 자질은 처음과 같습니다.’ 대답하자, 임금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손성孫盛의 ≪진양추晉陽秋≫에 말하였다. “세조世祖(사마염司馬炎)는 혜제惠帝(사마충司馬衷)가 〈천자의〉 대업大業을 계승하지 못할까 의심하여 화교和嶠순욱荀勗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다. 〈그들이 혜제를〉 만난 뒤에 순욱은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태자는 품덕이 더욱 진보하고 훌륭해졌으니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하였고, 화교는 ‘황태자는 자질이 처음과 같습니다. 이 일(후계자 선정)은 폐하의 가정사이니 신이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천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는 모두 화교가 충직하다고 칭찬하고 순욱을 완전히 죽이고자 하였다.”
살펴보건대, 순의는 청렴하고 우아하며 성품 상 아부하지 않았으니, 〈간보와 손성의〉 두 가지 설명을 비교해보면 손성의 설명이 타당하다.
두주頭註
왕세무王世懋순의荀顗도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역주
역주1 和嶠 : ?~292. 汝南 西平 사람으로, 字는 長輿, 시호는 簡이다. 魏(三國)나라 太常 和洽의 손자이자 吏部尙書 和逌(화유)의 아들이다. 부친의 작위 上蔡伯을 이어 받고 太子舍人으로 벼슬을 시작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에 中書令이 되었다.
역주2 文武의 왕위 계승 : 周나라 文王이 맏아들 伯邑考를 후계자로 선택하지 않고, 武王에게 제위를 물려준 일을 이른다.
역주3 司馬攸 : 248~283. 河內郡 溫縣 사람으로, 字는 大猷, 어릴 때 이름은 桃符, 시호는 獻이다. 晉 文帝(司馬昭)의 둘째 아들이자 武帝(司馬炎)의 同母弟이고, 어머니는 文明皇后(王元姬)이다. 伯父 司馬師의 양자가 되어 舞陽侯에 襲封되었고, 西晉시대에 齊王에 봉해졌으며, 驃騎將軍․司空․開府儀同三司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무제 만년에 조정의 안팎에서 그가 皇位를 계승해야 한다는 여론이 고조되었는데, 荀勖과 馮紞이 이를 기회로 자신을 참소하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36세의 나이로 피를 토하면서 죽었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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