蘇子美
는 豪放不羈
하고 好飲酒
注+① 宋史曰 “蘇舜欽, 字子美, 參知政事易簡之孫. 慷慨有大志. 范仲淹薦, 試集賢校理, 監進奏院. 舜欽娶宰相杜衍女. 衍時與仲淹․富弼在政府, 多引用一時聞人, 御史中丞王拱辰等, 不便其所爲. 會進奏院祠神, 舜欽輒鬻故紙公錢, 召妓樂會客. 拱辰㢘得之, 諷其屬劾奏, 因欲搖動衍. 舜欽坐除名, 既放廢, 寓居吳中, 買水石, 作滄浪亭, 益讀書自喜, 時發憤懣於歌詩, 往往驚人.러라 在外舅杜祁公家
注+② 宋史曰 “杜衍, 字世昌, 越州山陰人. 父遂良, 尚書員外郎. 衍苦志厲操, 尤篤於學, 擢進士甲科. 歷龍圖閣學士․刑部侍郎․樞密副使.”에 每夕讀書
호되 以一斗爲率
하니 公
이 深以爲疑
하여 密使覘之
라
子美가 讀漢書張良傳이라가 至良與客狙擊秦皇帝하여 撫掌曰
遂滿引一
하고 又讀至良曰始臣起下邳
하여 與上會於留
하니 此天以授陛下
하여 又撫案曰
公笑曰 有如此
하니 一斗不足多也
注+③ 史記曰 “張良, 其先五世相韓. 秦滅韓, 良悉以家財求客, 刺秦王. 嘗學禮淮陽, 東見倉海君, 得力士, 爲鐵椎, 重百二十斤. 秦皇帝東游, 良與客狙擊秦皇帝博浪沙中, 誤中, 更名姓, 亡匿下邳. 漢六年封功臣, 良未嘗有戰鬬功, 高帝曰‘運籌策帷帳中, 决勝千里外, 子房功也. 自擇齊三萬户.’ 良曰 ‘始臣起下邳, 與上會留, 此天以臣授陛下. 臣願封留足矣.’ 乃授張良爲留侯.”라하다
23-22 【
보補】
소자미蘇子美(
소순흠蘇舜欽)는 호방하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였다.
注+① ≪송사宋史≫ 〈소순흠전蘇舜欽傳〉에 말하였다. “소순흠蘇舜欽은 자字가 자미子美이고, 참지정사參知政事 소이간蘇易簡의 손자이다. 강개하고 원대한 뜻을 지녔다. 범중엄范仲淹이 천거하여 집현교리集賢校理에 시용試用하였고 을 감독하게 하였다. 소순흠은 재상 두연杜衍의 딸을 아내로 취하였다. 당시 두연은 범중엄․ 부필富弼과 같이 정부政府에 있으면서 당대의 명사名士들을 많이 끌어들였는데, 어사중승 왕공신王拱辰 등은 그들의 행태를 불편하게 여겼다. 마침 진주원에서 신에게 제사할 때면 소순흠이 번번이 왕진공이 그것을 탐지해내고 넌지시 자신의 하속에게 탄핵상주를 올리게 하여 그 참에 두연을 동요시키려 하였다. 소순흠은 공금횡령죄에 걸려 〈관적官籍에서〉 제명除名되었는데, 관직에서 쫓겨난 뒤 오吳 땅에 살면서 수석水石을 사들여 창랑정滄浪亭을 짓고는 더욱 독서에 힘쓰며 스스로 기뻐하였다. 때때로 시가詩歌에 분노를 드러내었는데 〈그 시가 뛰어나〉 종종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장인
두기공杜祁公(
두연杜衍)의 집에 있을 때
注+② ≪송사宋史≫ 〈두연전杜衍傳〉에 말하였다. “두연杜衍은 자字가 세창世昌이고, 월주越州 산음山陰 사람이다. 부친 두수량杜遂良은 상서원외랑尚書員外郎이었다. 두연은 의지가 굳고 절조가 엄하였으며, 특히 학문에 독실하여 진사과進士科의 갑과甲科에 발탁되었다.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형부시랑刑部侍郎․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하였다.” 매일 저녁 독서할 때마다 술 한 말을 기본으로 삼아 마셨다. 공이 매우 의심스럽게 여겨 몰래 엿보게 하였다.
소자미가 ≪
한서漢書≫ 〈
장량전張良傳〉을 읽다가 장량이 자객과 함께
진秦 황제皇帝(
진시황秦始皇)를 공격하는 대목에 이르자 손바닥을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두연杜衍
그리고는 마침내 잔에 가득 따라 마셨다. 또 읽다가 장량이 “처음에 신이
하비下邳에서 일어나 주상과
유留에서 만났으니, 이는 하늘이 〈신을〉 폐하께 준 것입니다.”라는 대목에 이르자 또
서안書案을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진시황秦始皇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는 것이 이처럼 어렵구나.”
그리고는 다시 한 잔을 들었다. 공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와 같은 안주거리가 있으니, 술 한 말도 많은 게 아니다.”
注+③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에 말하였다. “장량張良은 그의 선조 5대가 한韓나라의 재상이었다. 진秦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키자 장량은 자신의 재산을 다 들여 자객刺客을 구해 진왕秦王을 죽이려 하였다. 그는 회양淮陽에서 예학禮學을 배우고 동쪽에서 을 만나 역사力士를 구하고는 쇠망치를 만들었는데 무게가 120근이었다. 진황제秦皇帝가 동쪽을 유람할 때 장량이 자객과 함께 박랑사博浪沙에서 진황제를 공격하였으나 잘못하여 뒤따르던 수레를 맞추어서 성명을 바꾸고 하비下邳로 도망하여 숨었다. 한漢나라 6년(201)에 공신功臣을 봉할 때, 장량은 전투에서 세운 공로가 없었으나 한漢 고제高帝(유방劉邦)가 말하기를, ‘장막 안에서 전략을 짜고 천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한 것은 자방子房(장량)의 공로이다. 스스로 제齊나라의 3만 호戶를 택하라.’라고 하니, 장량이 말하였다. ‘과거에 신이 하비에서 일어나 주상과 유留에서 만났으니, 이는 하늘이 신을 폐하께 준 것입니다. 신을 유留 땅에 봉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마침내 장량을 임명하여 유후留侯로 삼았다.”장량張良
注
◦ 이지李贄:기공祁公(두연杜衍)은 상당히 통달하였으니, 기공이 이와 같았을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