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掾
이 年少時
에 人以比王苟子
注+① 苟子, 王脩小字也. 文字志曰 “脩, 字敬仁, 太原晉陽人. 父濛, 司徒左長史. 脩起家著作佐郞․瑯琊王文學, 轉中軍司馬, 未拜而卒, 時年二十四. 昔王弼之沒, 與脩同年, 故脩弟熙乃歎曰 ‘無愧於古人, 而年與之齊也.’”하니 許大不平
이라 時
에 諸人士及
法師
가 竝在會稽西寺講
할새 王亦在焉
이라
許意甚忿하여 便往西寺하여 與王論理하여 共決優劣하니 苦相折挫에 王遂大屈이라 許가 復執王理하고 王이 執許理하여 更相覆疏하니 王復屈이라 許謂支法師曰
君語는 佳則佳矣어니와 何至相苦邪아 豈是求理中之談哉리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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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許掾(
허순許詢)이 젊을 때 사람들이 그를
왕구자王苟子(
왕수王脩)에게 비교하니
注+① 구자苟子는 왕수王脩의 아명兒名이다.
≪문자지文字志≫에 말하였다. “왕수는 자字가 경인敬仁으로, 태원太原의 진양晉陽 사람이다. 그의 부친 왕몽王濛은 사도司徒의 좌장사左長史를 역임하였다. 왕수는 〈태학생도 아니고 관리도 아닌 상태에서〉 기용되어 저작좌랑著作佐郞과 낭야왕瑯琊王의 문학文學이 되고, 중군사마中軍司馬로 전직되었는데 부임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으니, 당시 나이 24세였다. 옛날에 왕필王弼이 사망했을 때의 나이가 왕수와 같았기 때문에 왕수의 아우 왕희王熙가 탄식하면서 ‘옛사람(왕필)에게 부끄러움이 없고, 〈세상을 떠난〉 나이도 그와 같구나.’ 하였다.” 허연이 크게 불평하였다. 당시에 여러 인사와
임법사林法師(
지둔支遁)가 모두
회계會稽의
서사西寺(
광상사光相寺)에서 강론했는데 왕구자도 그 자리에 있었다.
허연은 마음속으로 매우 화가 나서 곧장 서사로 가서 왕구자와 논리를 따져 함께 우열을 가리니, 격렬하게 서로 논쟁을 벌인 끝에 왕구자가 마침내 크게 패배하였다. 허연이 다시 왕구자의 논리를 취하고 왕구자가 허연의 논리를 취하여 다시 서로 반복하여 논쟁했는데 왕구자가 다시 패배하였다. 허연이 지법사支法師(지둔支遁)에게 물었다.
“그대의 의론은 훌륭하다면 훌륭하겠지만, 어찌 상대방을 그렇게 심하게 괴롭히는가. 이것이 어찌 이치를 찾을 때에 하는 담론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