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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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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신어보(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李永和 杜門却掃하고 絶跡하며 棄産營書이라 手自刪削 每歎曰
丈夫擁書萬卷이어니 何假百城注+① 北史曰 “李謐, 字永和. 少好學, 周覧百氏. 初師小學博士孔璠, 數年後璠還就謐請業. 同門生爲之語曰 藍謝青, 師何常? 在明經.’ 徴拜著作佐郎, 辭以授弟郁, 詔許之. 州再舉秀才, 公府)二辟, 竝不就. 唯以琴書爲業, 有絶世之心. 及卒, 博士孔璠等奏諡, 爲貞静處士.”이리오하다


23-18 【이영화李永和(이밀李謐)는 대문을 닫고 〈인사人事를〉 사절하였으며, 발길을 끊고 휘장을 내린 채 집안 살림을 내평개치고 서책에만 신경 썼다. 손수 서적을 산삭刪削할 때마다 매번 탄식하며 말하였다.
“장부가 만 권의 서적을 지녔는데, 어느 겨를에 높은 벼슬을 하여 많은 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注+① ≪북사北史≫ 〈이밀전李謐傳〉에 말하였다. “이밀李謐영화永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하였다. 처음에 소학박사 공번孔璠을 스승 삼았는데, 몇 년 뒤에는 공번이 도리어 이밀에게 나아와 배우기를 청하였다. 같은 문하의 생도들이 말하기를, ‘청색靑色남색藍色을 만들었으나 남색이 청색만 못하구나. 스승이 어찌 일정하겠는가. 경서經書에 밝은 데 달려 있다.’라고 하였다. 저작좌랑著作佐郎에 초빙되었으나 아우 이욱李郁에게 제수하는 것으로 사양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 에서 재차 그를 수재秀才로 천거하였고 공부公府에서 두 번이나 그를 초빙하였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오로지 가야금 연주와 독서로 본업을 삼고 세상과 단절하려는 마음을 지녔다. 그가 죽자 박사 공번 등이 시호諡號를 내려줄 것을 상주하여 ‘정정처사貞静處士’가 되었다.”


역주
역주1 下帷 : ‘장막을 내리다’, ‘휘장을 치다’라는 뜻으로, 독서하는 것을 말한다. 西漢의 학자 董仲舒가 장막을 드리운 채 강론을 하였으므로 제자들 중에서도 그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자가 있었으며, 독서에 심취한 나머지 3년 동안 집의 뜨락을 내다보지도 않았다는 고사가 전한다.(≪史記≫ 〈儒林列傳 董仲舒〉)
역주2 南面 : 古代에는 북쪽에 앉아 남쪽에서 하는 인사를 받는 것을 존귀한 지위로 생각하였으므로, 남면은 곧 帝王이나 諸侯 또는 卿大夫의 지위를 가리켰다. 후에는 존귀한 지위나 관원의 지위를 말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역주3 青成藍 : ≪荀子≫ 〈勸學〉篇의 “청색은 남색에서 얻었으나 남색보다 푸르다.[青取之于蓝 而青于蓝]”에서 나온 말이다. 後人이 前人보다 낫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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