袁宏
이 始作東征賦
에 都不道陶公
이라 胡奴
가 誘之狹室中
하고 臨以白刃
注+① 胡奴, 陶範, 別見.하여 曰
先公이 勳業如是어늘 君作東征賦에 云何相忽略고하니
精金百鍊
하니 在割能斷
이라 功則治人
이요 職思靖亂
하니 長沙之勳
은 爲史所讚
注+② 續晉陽秋曰 “宏爲大司馬記室參軍, 後爲東征賦, 悉稱過江諸名望. 時桓溫在南州, 宏語衆云 ‘我決不及桓宣城.’ 時伏滔在溫府, 與宏善, 苦諫之, 宏笑而不答. 滔密以啓溫, 溫甚忿, 以宏一時文宗, 又聞此賦有聲, 不欲令人顯問之. 後遊靑山飮酌, 旣歸, 公命宏同載, 衆爲危懼. 行數里, 問宏曰 ‘聞君作東征賦, 多稱先賢, 何故不及家君.’ 宏答曰 ‘尊公稱謂, 自非下官所敢專, 故未呈啓, 不敢顯之耳.’ 溫乃云 ‘君欲爲何辭.’ 宏卽答云 ‘風鑒散朗, 或披或引. 身雖可亡, 道不可隕. 則宣城之節, 信爲允也.’ 溫泫然而止.” 二說不同, 故詳載焉.이라하다
8-36
원굉袁宏이 처음 〈
동정부東征賦〉를 지었을 때
도공陶公(
도간陶侃)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호노胡奴(도간의 아들
도범陶範)가 그를 작은 방으로 불러내고는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면서
注+① 호노胡奴는 도범陶範으로, 따로 보인다. 말하였다.
도간陶侃
“선공先公(도간)의 공적이 이와 같이 〈훌륭한데도〉 그대는 〈동정부〉를 지을 때 어째서 그분을 등한시했는가?”
원굉이 궁지에 몰린 채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대답하였다.
“제가 도공에 대해 많이 언급했는데, 어째서 관련된 내용이 없다고 하십니까?”
“순정한 쇠붙이를 백 번 단련하니, 벨 때마다 제대로 잘랐네. 공적은 사람을 잘 다스린 것이고, 직분은 난리의 평정을 생각했으니,
은 역사에 의해 찬미되네.”
注+② 단도란檀道鸞의 ≪속진양추續晉陽秋≫에 말하였다. “원굉袁宏은 대사마大司馬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이 되었는데 뒤에 〈동정부東征賦〉를 지어 강남으로 넘어온 여러 명사들을 모두 칭송하였다. 당시에 환온桓溫이 남주南州(형주荊州)에 있었는데, 원굉이 사람들에게 ‘나는 에 대해 절대 언급하지 않겠다.’ 하였다. 당시에 복도伏滔가 환온의 막부에 있었는데, 원굉과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간절히 충고했지만, 원굉은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복도가 은밀히 이런 사실을 환온에게 알리자 환온은 매우 화가 났지만, 원굉이 당시 문종文宗(문단의 으뜸)이고 또 이 〈동정부〉의 명성이 자자하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사람을 시켜 드러내놓고 묻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후에 에서 유람하면서 술을 마시고 돌아올 때에 환온이 원굉에게 수레를 함께 타라고 명령하자, 여러 사람들이 〈원굉이 죽임을 당할까〉 우려하고 두려워하였다. 몇 리쯤 갔을 때 환온이 원굉에게 ‘듣자니, 그대가 〈동정부〉를 지어 선현을 크게 칭송했다고 하던데 어째서 나의 선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가?’ 묻자, 원굉이 ‘존귀하신 분의 이름은 본래 하관下官이 감히 제멋대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 아뢰지 못하고 감히 드러내지도 못한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환온이 ‘그대는 어떤 말을 하려고 했는가?’ 하니, 원굉이 즉시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뛰어나니, 물리치기도 하고 등용하기도 하였네. 몸은 비록 죽어 사라질 수 있지만, 도道는 무너질 수 없지. 선성(환온의 부친 환이桓彝)의 절개는 참으로 진실하네.’ 하고 대답하였다. 환온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본문과 ≪속진양추≫의〉 두 설명이 같지 않기 때문에 자세히 기록해둔다.
注
◦ 유신옹劉辰翁:이소理所(이치가 있는 곳)에 나아가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