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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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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孝標注+① 劉孝標自序曰 “峻, 字孝標, 平原人. 生於秣陵縣, 朞月歸故鄕. 八歲遇桑梓顚覆, 身充僕圉. 永明四年, 逃還京師, 後爲崔豫州刑獄參軍. 天監中, 詔掌石渠閣, 以病乞骸骨, 隱東陽金華山. 余嘗自比馮敬通, 而有同之者三, 異之者四. 何則? 敬通雄才冠世, 志剛金石. 余雖不及之, 而節亮慷慨, 此一同也. 敬通逢中興明君, 而終不試用. 余逢命世英主, 亦擯斥當年, 此二同也. 敬通有忌妻, 至於身操井臼. 余有悍室, 亦令家道轗軻, 此三同也. 敬通當更始世, 手握兵符, 躍馬肉食. 余自少迄長, 戚戚無懽, 此一異也. 敬通有子仲文, 官成名立. 余禍同伯道, 永無血胤, 此二異也. 敬通膂力剛强, 老而益壯. 余有犬馬之疾, 溘死無時, 此三異也. 敬通雖芝殘蕙焚, 終填溝壑, 而爲名賢所慕, 其風流郁烈芬芳, 久而彌盛. 余聲塵寂寞, 世不吾知, 魂魄一去, 將同秋草, 此四異也. 所以力自爲序, 遺之好事云.”하되
劉訏 超然越俗하여 如半天注+② 何佟之梁典曰 “劉訏, 字彦度, 平原人. 與陳留阮孚․李紳, 申金蘭之契, 築室鍾阜之傍, 共聽內義, 鑽尋典奧.”하고 劉歊 矯矯出塵하여 如雲中白鶴注+③ 梁書曰 “劉歊, 字士光, 劉懷慰之子. 生夕有香氣滿室. 幼有識慧, 十二讀莊子逍遙篇曰 ‘此可解耳.’ 客問之, 隨問而答, 皆有情理. 家人異之, 謂爲神童. 及長, 博學有文. 不娶不仕, 與族弟訏, 隱居求志, 遨遊林澤, 以山水書籍相娛. 諡貞節處士.”하니 皆儉歲之이요 寒年之纎纊이라하다


16-38 유효표劉孝標注+유효표劉孝標의 〈자서自序〉에 말하였다. “유준劉峻효표孝標평원平原 사람이다. 말릉현秣陵縣에서 태어났고 한 달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남제南齊 무제武帝영명永明 4년(486)에 도망쳐 경사京師로 돌아왔고 뒤에 이 되었다. 〈 무제武帝천감天監 연간(502~519)에 조서를 내려 석거각石渠閣을 담당하도록 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동양東陽금화산金華山에 은거하였다. 내 일찍이 자신을 풍경통馮敬通(풍연馮衍)과 비교해 본 적이 있는데, 같은 점이 3가지였고 다른 점이 4가지였다. 어떤 것인가 하면, 풍경통은 출중한 재능이 세상의 으뜸이고 뜻은 금석金石처럼 굳세었다. 내 비록 그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절개가 굳고 기개가 충만하니 이것이 첫 번째 같은 점이다. 풍경통은 중흥中興의 현명한 군주(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를 만났으나 끝내 〈자신의 뜻과 학문을〉 시험해 보지 못하였다. 나는 훌륭한 시절의 영명英明한 군주를 만났으나 마찬가지로 당시에 배척당하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같은 점이다. 풍경통에게는 질투가 심한 처가 있었는데, 〈계집종을 쫓아내고〉 직접 물을 긷고 절구질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에게는 사나운 안사람이 있어 마찬가지로 가도家道를 순탄하지 못하게 했으니 이것이 세 번째 같은 점이다. 풍경통은 경시제更始帝(유현劉玄)의 시대를 만나 병부兵符를 손에 쥐고 좋은 말을 타고 고기를 먹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장성하기까지 걱정만 하고 기쁜 일은 없었으니 이것이 첫 번째 다른 점이다. 풍경통에게는 자식 풍중문馮仲文(풍표馮豹)이 있는데 벼슬에 오르고 이름을 알렸는데, 나는 불행히 이것이 두 번째 다른 점이다. 풍경통은 체력이 강하고 노익장을 과시했다. 나는 질병이 있어 언제 갑자기 죽을지를 모르니, 이것이 세 번째 다른 점이다. 풍경통은 비록 죽어서 구학溝壑에 뒹굴었지만, 명현名賢들이 흠모하여 그 유풍遺風이 진하게 향기를 풍겼으며 시간이 갈수록 더욱 성대해졌다. 나는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세상이 나를 모르니 혼백이 한번 떠나면 장차 가을풀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 다른 점이다. 이 때문에 애써 〈자서自序〉를 지어 호사가들에게 남긴다.” 품평했다.
유우劉訏초연超然히 세속을 뛰어넘어 하늘의 붉은 노을 같고,注+에 말하였다. “유우劉訏언도彦度평원平原 사람이다. 진류陳留원부阮孚이신李紳금란지교金蘭之交를 맺고 종부鍾阜 옆에 집을 짓고는 함께 내의內義(불교의 교리)를 듣고 경전經典의 심오한 뜻을 연구하였다.” 유효劉歊는 미련없이 티끌세상 벗어나 구름속 흰 학 같다.注+③ ≪양서梁書≫에 말하였다. “유효劉歊사광士光으로 유회위劉懷慰의 아들이다. 태어나던 날 저녁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어려서부터 지혜로웠는데, 12세에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를 읽고 ‘이것은 이해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손님이 물어보자 묻는대로 바로 대답하였는데 모두 인정人情도리道理에 합당하였다. 집안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겨 ‘신동神童’이라고 하였다. 장성해서는 박학다식博學多識하고 문채가 있었다. 장가도 들지 않고 벼슬도 하지 않으면서 족제族弟유우劉訏와 은거하며 뜻한 바를 추구하였으며, 자연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산수山水서적書籍으로 서로 즐겼다. 시호는 정절처사貞節處士이다.” 모두 흉년의 곡식이고 추운 해의 고운 솜 같은 존재이다.”


역주
역주1 【補】 : 저본에는 ‘補’가 없으나, 이 일화는 ≪世說新語≫에는 실려 있지 않고 ≪何氏語林≫에 실려 있는 것에 의거하여 ‘補’자를 보충하였다.
역주2 8세에……되었다 : 宋 泰始 연간(465~471) 초에 北魏에 의해 靑州가 함락되면서 中山으로 잡혀갔었는데, 중산의 부자 劉實이 유준을 불쌍히 여겨 贖身시켜주고 공부를 가르쳤다.(≪梁書≫ 〈劉峻列傳〉)
역주3 崔豫州의 刑獄參軍 : ≪通志≫ 〈列傳〉에는 南齊 明帝 때에 蕭遙欣이 豫州尹이 되었을 때 劉峻을 刑獄參軍으로 삼은 것으로 되어 있다.
역주4 鄧伯道와……없으니 : 石勒의 병란 때에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피난하다가 둘을 모두 보호할 수 없겠다고 판단하여 자기 아들은 버려두어 죽게 하고 먼저 죽은 동생의 아들을 대신 살렸는데, 그 뒤에 끝내 후사를 얻지 못하였다.(≪晉書≫ 〈鄧攸列傳〉)
역주5 何佟之의 ≪梁典≫ : ≪隋書≫ 〈經籍志〉에 ≪梁典≫이 두 가지 기재되어 있는데 저자는 각각 劉璠과 何之元이며 모두 30권으로 되어 있다. 何佟之는 ≪梁典≫을 지은 적이 없으니, 혹 ‘何佟之’는 ‘何之元’의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 南北朝시대 梁나라의 역사서이다.
역주6 (末)[朱] : 저본에는 ‘末’로 되어 있으나, ≪何氏語林≫과 ≪李卓吾批點世說新語補≫(安永本)에 의거하여 ‘朱’로 바로잡았다.
역주7 (梁)[粱] : 저본에는 ‘梁’으로 되어 있으나, ≪何氏語林≫과 ≪李卓吾批點世說新語補≫(安永本)에 의거하여 ‘粱’으로 바로잡았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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