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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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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신어보(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鄧攸 始避難할새 於道中 棄己子全弟子注+① 晉陽秋曰 “攸, 字伯道, 平陽襄陵人. 七歲喪父母及祖父母, 持重九年. 性淸愼平簡.” 鄧粲晉紀曰 “永嘉中, 攸爲石勒所獲. 召見, 立幕下, 與語說之, 坐而飯焉. 攸車所止, 與胡人隣轂, 胡人失火, 燒車營. 勒吏案問胡, 胡誣攸. 攸度不可與爭, 乃曰 ‘向爲老姥作粥, 失火延逸, 罪應萬死.’ 勒知遣之, 所誣胡厚德攸, 遺其驢馬, 護送令得逸.” 王隱晉書曰 “攸以路遠, 斫壞車, 以牛馬負妻子, 以叛賊又掠其牛馬. 攸語妻曰 ‘吾弟早亡, 唯有遺民. 今當步走, 儋兩兒盡死, 不如棄己兒抱遺民. 吾後猶當有兒.’ 婦從之.” 中興書曰 “攸棄兒於草中, 兒啼呼追之, 至暮復及. 攸明日繫兒於樹而去, 遂渡江. 至尙書左僕射. 卒, 弟子綏服攸齊衰三年.”하다 旣過江 取一妾한대 甚寵愛러니 歷年後 訊其所由하니 妾具說是北人遭亂하고 憶父母姓名한대 乃攸之甥也 素有德業하고 言行無玷하니 聞之哀恨하고 終身遂不復畜妾하다
【頭註】
劉云 “謂繫兒樹上者, 喜談全姪, 而甚之也. 使其追及, 任所能行, 何事於繫? 言繫者謬, 罪繫又非.”
王云 “世難萬不兩全. 勢不周旋則可, 何爲苦繫之樹? 必欲殺之. 本欲頌鄧公高誼, 乃令成一大忍人. 中興書於是爲不情矣.”


1-41 등유鄧攸가 처음에 피난避難 갈 때 도중에 자기 자식을 버리고 동생의 자식을 살렸다.注+① ≪진양추晉陽秋≫에 “등유鄧攸패도伯道이고 평양平陽 양릉襄陵 사람이다. 7세 때 부모와 조부모를 여의어 9년 동안 상복喪服을 입었다. 성품이 청렴하고 신중하며 온화하고 관대하였다.” 하였다.
에 말하였다. “영가永嘉(307~313) 중에 등유가 석륵石勒에게 잡혔다. 〈석륵이〉 그를 만나볼 때 막하幕下에 세워두었다가 대화를 나누어보고는 기뻐하여 앉아서 식사를 하게 하였다. 등유의 수레를 세워둔 곳은 호인胡人과 수레를 이웃하고 있었는데 호인이 실수로 불을 내 차영車營이 불에 탔다. 석륵의 관리가 호인을 심문하자 호인이 등유를 무함하였다. 등유는 그와 더불어 다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지난번에 노모를 위해 죽을 끓이다가 실수로 불을 내 번지게 되었으니 그 죄가 만 번 죽는 데 해당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석륵이 사정을 알아채고 등유를 보내주게 하니, 그를 무고하였던 호인이 등유에게 깊이 감사하여 그에게 려마驢馬를 보내 호송하여 빠져나가게 해주었다.
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 말하였다. “등유가 갈 길이 멀기 때문에 수레를 찍어 부수고 소와 말에 처자를 태웠는데, 반군이 또 그 소와 말을 노략질하였다. 등유가 자신의 처에게 ‘나의 동생이 일찍 죽어 오직 만 있소. 지금 걸어서 도망하는데 두 아이를 업고 가게 되면 모두 죽게 될 것이니 우리 아이를 버리고 유민을 안고 가는 것만 못하오. 우리는 나중에 또 아이가 생길 것이오.’ 하니 부인이 그 말을 따랐다.”
에 말하였다. “등유가 수풀 속에 아이를 버리자 아이가 소리치고 울며 따라와 저물녘에 다시 그들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등유가 다음날 아이를 나무에 묶어두고 떠나 마침내 강을 건너갔다. 지위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렀다. 등유가 죽자 동생의 자식인 등수鄧綏가 3년간 자최복齊衰服을 입었다.”
강을 건너간 뒤에 을 하나 취하였는데 매우 총애하였다. 몇 년이 지난 뒤에 첩의 지난 이력을 물었더니 첩이 자신은 난리를 만나 북쪽에서 온 사람임을 상세히 말하였고, 부모의 성명을 기억해냈는데 바로 등유의 조카딸이었다. 등유는 평소 덕행德行이 있고 언어와 행동에 결점이 없었는데 그 말을 듣고 비통하고 한스러워 죽을 때까지 마침내 다시는 첩을 두지 않았다.
두주頭註
유진옹劉辰翁:아이를 나무에 묶은 것을 조카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좋게 말하나, 그것은 심한 것이다. 그 아이가 따라올 수 있었다면 그가 갈 수 있는 대로 놔두어야 하지, 어찌 묶어놓는 짓을 했단 말인가. 〈조카를 살리기 위해〉 묶어놓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고, 묶어놓은 것을 탓하는 것 또한 잘못이다.
왕세무王世懋:당세의 난리 속에서는 도저히 두 아이를 다 보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형세상 주선하지 못한 것은 그럴 수 있으나 어찌하여 굳이 나무에 묶었단 말인가. 필시 그 아이를 죽이고자 한 것이다. 〈이 일화는〉 본래 등공鄧公의 고상한 덕행을 칭송하기 위한 것인데 결국은 너무나도 잔인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중흥서中興書≫에서는 이 일에 대하여 무정無情하다고 하였다.


역주
역주1 鄧粲의 ≪晉紀≫ : 東晉의 史家 鄧粲이 편찬하였으며 모두 10권이다. 西晉시기 특히 元帝와 明帝의 역사를 다루어 ≪元明紀≫라고도 한다. 名臣․文人․處士․列女․淸談家의 舊聞과 軼事에 대한 내용이 많다. 원본은 산실되었고, 지금은 淸나라 때 湯球와 陳運溶이 집록한 輯本 2종이 있다. 鄧粲은 字가 長眞이며 東晉의 대대로 벼슬한 집안 출신으로, 그의 부친 鄧騫은 동진의 저명한 정치가였다.(≪晉書≫ 〈鄧粲傳〉)
역주2 遺民 : 저본에는 ‘遺民’으로 되어 있으나, ≪晉書≫ 〈良吏傳〉에는 ‘一息’으로 되어 있다. ≪世說箋本≫에는 ‘유민’을 鄧綏의 어릴 적 字라 하였다.
역주3 中興書 : 宋(南朝)나라 사람 何法盛이 편찬하였고, 東晉의 事跡을 기록한 紀傳體 史書이다. ≪晉中興書≫라고도 하며 78권이다. 何法盛은 宋 孝武帝때 奉朝請․校書東宫을 지냈다. 사료적 가치가 뛰어나, 劉知幾는 이 책이 東晉의 史書 중에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 원본은 산실되었고, 지금 黄奭의 輯本 등 여러 종의 집본이 있다. 何法盛은 宋나라의 湘東太守를 지냈다. 李延壽의 ≪南史≫에서는 이 책의 편찬자가 하법성이 아니라 郗紹라고 하였다.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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