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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유鄧攸가 처음에
피난避難 갈 때 도중에 자기 자식을 버리고 동생의 자식을 살렸다.
注+① ≪진양추晉陽秋≫에 “등유鄧攸는 자字가 패도伯道이고 평양平陽 양릉襄陵 사람이다. 7세 때 부모와 조부모를 여의어 9년 동안 상복喪服을 입었다. 성품이 청렴하고 신중하며 온화하고 관대하였다.” 하였다.
에 말하였다. “영가永嘉(307~313) 중에 등유가 석륵石勒에게 잡혔다. 〈석륵이〉 그를 만나볼 때 막하幕下에 세워두었다가 대화를 나누어보고는 기뻐하여 앉아서 식사를 하게 하였다. 등유의 수레를 세워둔 곳은 호인胡人과 수레를 이웃하고 있었는데 호인이 실수로 불을 내 차영車營이 불에 탔다. 석륵의 관리가 호인을 심문하자 호인이 등유를 무함하였다. 등유는 그와 더불어 다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지난번에 노모를 위해 죽을 끓이다가 실수로 불을 내 번지게 되었으니 그 죄가 만 번 죽는 데 해당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석륵이 사정을 알아채고 등유를 보내주게 하니, 그를 무고하였던 호인이 등유에게 깊이 감사하여 그에게 려마驢馬를 보내 호송하여 빠져나가게 해주었다.
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 말하였다. “등유가 갈 길이 멀기 때문에 수레를 찍어 부수고 소와 말에 처자를 태웠는데, 반군이 또 그 소와 말을 노략질하였다. 등유가 자신의 처에게 ‘나의 동생이 일찍 죽어 오직 만 있소. 지금 걸어서 도망하는데 두 아이를 업고 가게 되면 모두 죽게 될 것이니 우리 아이를 버리고 유민을 안고 가는 것만 못하오. 우리는 나중에 또 아이가 생길 것이오.’ 하니 부인이 그 말을 따랐다.”
에 말하였다. “등유가 수풀 속에 아이를 버리자 아이가 소리치고 울며 따라와 저물녘에 다시 그들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등유가 다음날 아이를 나무에 묶어두고 떠나 마침내 강을 건너갔다. 지위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렀다. 등유가 죽자 동생의 자식인 등수鄧綏가 3년간 자최복齊衰服을 입었다.” 강을 건너간 뒤에
첩妾을 하나 취하였는데 매우 총애하였다. 몇 년이 지난 뒤에 첩의 지난 이력을 물었더니 첩이 자신은 난리를 만나 북쪽에서 온 사람임을 상세히 말하였고, 부모의 성명을 기억해냈는데 바로 등유의 조카딸이었다. 등유는 평소
덕행德行이 있고 언어와 행동에 결점이 없었는데 그 말을 듣고 비통하고 한스러워 죽을 때까지 마침내 다시는 첩을 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