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세설신어보(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路巖注+① 唐書曰 “巖, 字魯瞻, 陽平冠氏人. 祖季, 諫議大夫. 父群, 精經學, 志行貞潔, 爲翰林學士. 巖幼聰敏過人, 登大中進士, 以戶部侍郞同平章事, 年始三十六.” 佐崔鉉於淮南하여 爲支使注+② 劉昫唐書曰 “崔鉉, 字台碩, 義成節度使元略子也. 累官戶部侍郞, 會昌末, 以本官平章事爲同列李德裕所嫉, 罷相.”일새 鉉知其必貴 嘗曰
路十 終須作彼一官注+③ 胡三省通鑑注曰 “謂作相也.”이리라하다
旣而入爲監察御史하여 不出長安城十年 至宰相이라 其入翰林日 鉉猶在淮南이라가 聞之曰
路十 今已入翰林하니 오라하다 後皆如鉉言이라


14-32 노암路巖注+① ≪당서唐書≫ 〈노암전路巖傳〉에 말하였다. “노암路巖노첨魯瞻이고, 양평陽平 관씨冠氏 사람이다. 조부 노계路季간의대부諫議大夫였다. 부친 노군路群경학經學에 정통하였고 뜻이 바르고 행실이 고결하였으며 한림학사를 지냈다. 노암은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보다 월등하게 총명하고 기민하였다. 에 올랐고 호부시랑동평장사戶部侍郞同平章事가 되었을 때가 겨우 36세였다.” 회남淮南에서 최현崔鉉을 보좌하여 로 있을 때,注+유후劉昫의 ≪당서唐書≫에 말하였다. “최현崔鉉태석台碩이고, 의성절도사義成節度使 최원략崔元略의 아들이다. 여러 번 승진하여 호부시랑에 이르렀다. 회창會昌(841~846) 말에 로서 동료 이덕유李德裕의 시기를 받아 재상에서 파직되었다.” 최현은 그가 반드시 귀하게 될 줄 알았다. 한번은 말하였다.
노십路十(노암)은 나중에 재상이 될 것이다,”注+호삼성胡三省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말하기를, “〈일관一官은〉 재상이 되는 것을 이른다.” 하였다.
〈노암이〉 얼마 뒤 감찰어사로 들어가서 장안성長安城을 나가지 않고 10년 만에 재상이 되었다. 그가 에 들어간 날 최현은 여전히 회남에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노십路十이 지금 벌써 한림원에 들어갔으니 어찌 〈한림원에서〉 늙겠는가.” 나중에 모두 최현이 말한 대로 되었다.


역주
역주1 【補】 : 저본에는 ‘補’가 없으나, 이 일화는 ≪世說新語≫가 아닌 ≪何氏語林≫에 있으므로 ‘補’를 보충하였다.
역주2 大中進士 : 대중은 宣宗의 연호(847~860)이다. 路巖이 대중 연간에 進士가 되었다는 말이다.
역주3 支使 : 唐나라 관찰사 막하에 소속하여 表ㆍ牋ㆍ書翰 등 書記의 직임을 담당했던 관원이다.(≪世說音釋≫)
역주4 本官平章事 : ‘平章事’라는 명칭은 唐나라때 처음 나타난다. 당시 중서성과 상서성의 장관이 재상이 되었으나 관직이 높고 권한이 막중하여 상시적으로 설치하지는 않고, 다른 관원을 선발하여 本官 외에 ‘同中書門下平章事(약칭 ‘同平章事’)’라는 명칭을 더해주어 재상의 역할을 맡게 하였다.(≪新唐书≫ 〈百官志〉) 여기서 최현은 ‘호부시랑’이라는 本官에 ‘평장사’라는 명칭이 더해졌으므로 재상이 되었음을 말한다.
역주5 翰林院 : 唐나라 때 처음 생긴 이후, 주로 황실과 나라의 문화ㆍ예술 사업과 황실의 實錄 등 학술 활동을 총괄하던 기관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학사를 翰林學士라 불렀다.
역주6 如何得老 : ≪世說音釋≫에 ‘어떻게 翰林에서 늙겠는가[如何得老於翰林]’라는 의미라고 하였으니, 한림원에서 늙지 않고 재상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