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세설신어보(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黃初中 有甲乙疑論注+① 殷基通語曰 “司馬懿誅曹爽, 費褘設甲乙論. 甲以爲 ‘曹爽兄弟, 凡品庸人, 以宗子枝屬得蒙顧命, 而驕奢僭逸, 交非其人, 私樹朋黨, 謀以亂國. 懿奮誅戮, 一朝殄盡, 此所以副士民之望也.’ 乙以爲 ‘懿感曹仲附己不一, 豈爽與相干. 事勢不專, 以此陰成疵瑕. 初無忠告侃爾之訓, 一朝屠戮, 讒其不意, 豈大人經國篤本之事乎. 若爽信有謀主之心, 大逆已搆, 而發兵之日, 更以芳委爽兄弟. 懿父子從後閉門擧兵, 蹙而向芳, 豈忠臣爲君深謀之謂乎. 以此推之, 爽無大惡, 明矣. 若懿以爽奢僭, 廢之可也. 滅其尺口, 被以不義, 絶子丹血食, 及何晏, 魏之親甥, 亦與同戮, 爲僭濫不當矣.’”하니 荀仲茂注+② 荀氏家傳曰 “荀閎, 字仲茂, 諶之子, 爲太子文學掾.” 鍾元常注+③ 魏志曰 “繇, 字元常, 潁川長社人. 家貧好學, 歷大理․相國, 遷太傅.” 王景興 袁曜卿注+④ 魏志曰 “袁渙, 字曜卿, 陳郡扶樂人. 父滂, 漢司徒. 渙避地江淮, 爲袁術所命. 呂布擊術於阜陵, 渙往從之, 爲布所拘留.” 袁氏世紀曰 “布之破也, 陳群父子亦在布軍. 見太祖皆拜, 渙獨高揖, 太祖甚嚴憚之. 時太祖給衆官車各數乘, 使取布軍中物, 衆人皆重載, 渙取書數百卷而已.” 議各不同이라 文帝謂元常曰
袁王 國士 更爲唇齒어니와 荀閎 勁悍하고 往來銳師하니 眞君侯之勍敵이요 左右之深憂라하다


8-8 위진魏晉시대 문제文帝(조비曹丕)의〉 황초黃初 연간(220∼226)에 이 있었는데,注+에 말하였다. “〈나라의〉 사마의司馬懿조상曹爽을 주살하자, 〈나라 강하江夏 사람〉 비위費褘(비문위費文偉)가 갑을론甲乙論을 펼쳤다. 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그런데 그들은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며 분수에 넘치고 방종하며, 교제하는 사람은 올바른 사람이 아니며, 개인적으로 붕당朋黨을 세우고 반란을 도모해 국가를 어지럽혔다. 사마의가 분격하여 그들을 도륙하여 하루아침에 모두 죽였으니, 이는 백성의 여망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사마의는 이 자기를 따르는 것이 한결같지 않다고 유감스러워했으니 어찌 조상이 역모에 관여했겠는가. 〈사마의는〉 상황을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하자 이로써 은밀히 〈조상의〉 허물을 만들어냈다. 애초에 부드럽게 충고하는 가르침도 없이 하루아침에 도륙하고 어찌 대인이 국가를 경영하고 근본을 돈독히 하는 일이겠는가. 만약 진실로 조상이 군주를 제거하려는 마음을 품어 대역부도한 짓을 이미 꾸몄다면 〈사마의가〉 거병하는 날에 다시 소제少帝 조방曹芳조상曹爽 형제에게 맡겼겠는가. 사마의 부자는 〈조상 형제가 조방을〉 수행하도록 조치한 뒤에 궁문을 닫고 군대를 일으켜 압박하면서 조방을 향해 갔으니, 어찌 충신이 군주를 위해 심도 있게 계획했다고 하겠는가. 이로써 추론한다면 조상에게 대악大惡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사마의가 조상의 사치와 참람을 근거로 관직에서 쫒아냈다면 괜찮다. 그러나 갓난아이까지 죽이고 조상에게 불의不義의 죄명을 뒤집어 씌워 그의 부친 자단子丹(조진曹眞)의 혈식血食(제사)을 끊어버리며, 까지 그들과 함께 죽였으니, 이는 참람하여 옳지 않은 짓이다.’”
순중무荀仲茂(순굉荀閎)․注+의 〈순씨가전荀氏家傳〉에 말하였다. “순굉荀閎중무仲茂로, 순심荀諶의 아들이고, 태자太子문학연文學掾을 역임하였다.”종원상鍾元常(종요鍾繇)․注+③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종요전鍾繇傳〉에 말하였다. “종요는 원상元常으로, 영천潁川장사長社 사람이다. 집이 가난했으나 배움을 좋아하였고, 대리大理상국相國을 역임하고 태부太傅로 전직되었다.”왕경흥王景興(왕랑王朗)․원요경袁曜卿(원환袁渙)의注+④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원환전袁渙傳〉에 말하였다. “원환은 요경曜卿으로, 진군陳郡부락扶樂 사람이다. 부친 원방袁滂나라의 사도司徒를 역임하였다. 원환이 강회江淮지역에서 피난생활을 할 때 원술袁術에 의해 임용되었다. 여포呂布부릉阜陵에서 원술을 공격할 때 원환이 〈원술을〉 따라갔다가 여포에게 잡혀 머물게 되었다.”
원씨세기袁氏世紀≫에 말하였다. “여포가 〈조조曹操에 의해〉 격파당했을 때 진군陳群 부자도 여포의 군중軍中에 있었다. 그들이 태조(조조)를 만났을 때 모두 절을 올렸지만, 원환만 유독 머리 위로 손을 올려 을 하고 〈절을 하지 않으니〉 태조가 매우 두려워하고 꺼렸다. 당시에 태조가 여러 관리들에게 각각 수레 몇 대씩을 주면서 여포의 군중에 있는 재물을 가져가라고 했는데, 여러 사람들이 모두 〈재물을〉 무겁게 실어 갔으나 원환은 서책 수백 권만 가지고 갔을 뿐이었다.”
의론이 각각 달랐다. 문제文帝가 종원상에게 말하였다.
위魏 문제文帝(조비曹丕)위魏 문제文帝(조비曹丕)
“원요경과 왕경흥은 국사國士이고, 또 나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소. 그러나 순굉은 굳세고 사나우며 날랜 군사를 데리고 왕래하니, 정말 군후君侯에게 있어 강한 적이고 지근거리의 깊은 근심거리요.”


역주
역주1 【補】 : 저본에는 ‘補’가 없으나, 이 일화는 ≪世說新語≫가 아닌 ≪何氏語林≫에 있으므로 ‘補’를 보충하였다.
역주2 甲乙疑論 : 가상으로 甲과 乙 쌍방을 설정하여 서로 문답함으로써 의심과 논란 사항을 논변하여 명확하게 하는 것으로, 甲乙問이라고도 한다.
역주3 殷基의 ≪通語≫ : ‘은기’는 삼국시대 吳나라 零陵太守 殷禮의 아들로, 無難督(오나라 官號)을 역임하였다. 그는 재주와 학문으로 명성을 날리고, ≪통어≫ 수십 편을 지었다.(≪三國志≫ 〈吳書 顧雍傳〉의 裴松之의 注에서 인용한 〈文士傳〉) ≪世說音釋≫에서는 원주에서 ≪통어≫를 인용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黃初는 魏 文帝가 사용한 연호(220∼226)이다. 司馬懿가 曹爽을 죽인 일은 少帝 曹芳의 嘉平 원년(249)에 있었으니, 황초 연간과는 대략 30년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주석에서 費褘의 甲乙論을 언급한 은기의 ≪통어≫를 인용한 것은 오류이다. 魚豢의 ≪魏略≫에 “황초 원년 이후에 新主가 먼지 낀 太學을 청소하고 옛날 비석의 缺字를 보충하며, 學士의 員錄을 갖추고 시험을 치렀다. 배우고자 하는 학생을 태학에 보내라고 州郡에 거듭 고지하고, 태학이 열려 수백 명의 학생이 모였다.” 하였으니, 원문의 甲乙議論은 이 일을 가리킨다.
역주4 조상……받았다 : 曹爽은 字가 昭伯으로, 曹操의 조카인 大司馬 曹眞의 아들이다. 魏나라 景初 2년(238) 明帝(曹丕의 아들 曹叡)가 병이 위중해지자, 조상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太尉 司馬懿와 함께 양자로 들인 후계자 曹芳을 보좌하라는 유조를 내렸다. 조상은 何晏과 丁謐 등이 바친 계책을 써서 사마의를 太傅가 되게 함으로써 兵權을 독점하고, 아우들에게 禁軍을 나누어 거느리게 하며, 何晏을 비롯한 측근들에게 권력을 장악하게 하였다. 사마의가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자, 조상은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탕한 짓을 하였다. 少帝(조방)의 嘉平 원년(249)에 사마의는 조상이 그의 형제들과 소제를 수행하여 高平陵(明帝陵)에 성묘하러 간 틈에 정변을 일으켜 洛陽을 장악한 뒤, 황태후의 명령을 받아내 洛水의 浮橋에 주둔한 채 환궁하는 조방 일행을 맞이하여 조상의 죄악을 조방에게 고하고, 조상의 병권을 넘겨받은 뒤 조상과 그의 아우 曹羲․曹訓 등을 모반죄로 참수하고 三族을 멸하였다.(≪三國志≫ 〈魏書 明帝紀〉․〈魏書 曹爽傳〉)
역주5 曹仲(魏 明帝) : 위 명제 曹叡의 字가 元仲이기 때문에 蜀나라에서는 그를 曹仲이라고 불렀다.(≪世說箋本≫)
역주6 그들이……참소했으니 : 曹爽 형제들이 魏 少帝 曹芳을 수행하여 高平陵(明帝陵)에 참배한 틈을 노려 정변을 일으킨 뒤 조상의 죄악을 조방에게 고한 일을 말한다.(≪三國志≫ 〈魏書 曹爽傳〉)
역주7 魏나라의……何晏 : 하안은 曹操의 딸 金鄕公主와 결혼하였다.
역주8 荀伯子 : 378~438. 魏晉南北朝시대 宋나라 潁川 사람으로, 경전에 박식하였다. 晉나라에서 벼슬하여 徐廣과 함께 ≪晉史≫를 찬수하였고, 송나라에서는 太子傅․御史中丞․東陽太守를 역임하였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