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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補】
배관裴寛이 군수에서 파직되어 서쪽으로 돌아갈 때
注+① 송기宋祁의 ≪당서唐書≫에 말하였다. “배관裴寛은 문희聞喜 사람이며 성품이 화통하고 명민하였다. 경운景雲(710~711) 연간에 윤주참군潤州參軍이었는데, 자사刺史 위신韋詵이 누각에 올라 보니 뒷밭에서 〈무언가를〉 파묻고 있는 사람이 있어 찾아가보니 배참군裴參軍의 거처였다. 무슨 일인가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저 배관은 도의상 뇌물 때문에 가문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마침 어떤 사람이 사슴고기를 선물로 놔두고 가버려 감히 스스로를 속일 수 없기에 〈그것을〉 파묻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위신이 감탄하고 특별하게 여겨 그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천보天寶(742~756) 연간에 벼슬하여 관직이 호부상서户部尚書와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역임하였는데, 이임보李林甫가 그를 미워하여 저양태수雎陽太守로 좌천되었다. 동해태수東海太守로 옮겨갔다가 중앙에 들어가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다.” 나무 밑에 앉아 있던 선비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몹시 가난해 보였다. 함께 대화해보고는 그를 특별하게 여겨 배에 있던 금과 비단을 모두 다 주자, 그 사람은 이를 사양하지 않았다. 그가 배에 올라 말을 듣지 않는 노비를 대번에 채찍질하니, 바로
장張 서주徐州(
장건봉張建封)였다.
注+② ≪신당서新唐書≫ 〈장건봉전張建封傳〉에 말하였다. “장건봉張建封은 자字가 본립本立이고 등주鄧州 남양南陽 사람인데, 연주兗州에서 타향살이를 하며 은둔하였다. 부친은 장개張玠이다. 장건봉은 어려서부터 문장을 좋아하고 변론에 능했으며, 강개하고 의기義氣를 숭상하여 스스로 공명功名으로 현달하게 될 것이라 자부하였다.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 위지진韋之晉이 초빙하여 병조참군兵曹參軍에 임명하였으나 직분을 좋아하지 않아 별안간 떠나갔다. 마수馬燧가 평소 그를 알아주어 〈황제에게〉 상주하여 판관判官으로 삼고 감찰어사監察御史에 발탁하였다. 그 공功으로 어사대부御史大夫․서사호절도사徐泗濠節度使로 승진하였다. 서주를 다스린 10년 동안에 군대가 크게 다스려졌고 수하手下가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좋아하였으며 선비들이 마치 〈제집으로〉 돌아오듯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