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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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誠之注+① 宋史曰 “李師中, 字誠之, 楚丘人. 父緯爲涇原都監, 當責降, 師中詣宰相辯詰, 由是知名. 擧進士, 知洛川縣, 多善政, 歷知兗․濟․舒․瀛等州.” 在仁宗朝일새 因邸吏報包希仁한대 或曰
朝廷自此多事矣리라하니
李曰
包公 無能爲 今鄞令王安石者 眼多白 甚似王敦하니 他日亂天下 必此人注+② 呂氏家塾記曰 “包拯, 字希仁. 嘗爲京尹, 令行禁止, 天下皆呼爲包待制.” 又曰 “包家, 故市井小民, 及田野之人, 見徇私者, 皆指笑之曰 ‘爾一箇包家’, 見貪汚者曰 ‘爾一箇司馬家’. 蓋當時亦稱司馬君實爲司馬家.”이리라하다


14-34 【대제待制 이성지李誠之(이사중李師中)가注+① ≪송사宋史≫ 〈이사중전李師中傳〉에 말하였다. “이사중李師中성지誠之이고, 초구楚丘 사람이다. 부친 이위李緯경원도감涇原都監이었을 때 견책을 받아 강등될 상황에 처했는데, 이사중이 재상에게 나아가 변론하여 이로 인해 이름이 알려졌다. 진사進士에 올라 낙천현洛川縣이 되어 선정善政을 많이 베풀었고, 연주兗州제주濟州서주舒州영주瀛州 등의 자사를 역임하였다.” 인종仁宗(조정趙禎)의 조정에 있을 때, 를 통해 포희인包希仁(포증包拯)이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조정이 이제부터 일이 많아지겠습니다.”
그러자 이대제가 말하였다.
포공包公(포증)은 〈일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왕안석王安石이라는 자가 눈에 흰자위가 많은 것이 왕돈王敦과 매우 흡사하니, 훗날 천하를 어지럽힐 자는 필시 이 사람일 것입니다.”注+에 말하였다. “포증包拯희인希仁이다. 경윤京尹이 되었을 때 금령禁令을 시행하여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를 포대제包待制라 불렀다.”
≪여씨가숙기≫에 말하였다. “포가包家는 예전에 저자거리의 소민小民이나 시골 촌사람이었으므로, 〈당시에〉 사리私利를 좇는 자를 보면 모두 손가락질하고 비웃으며 ‘너는 일개 포가이다.’라고 하였고, 탐오하고 부패한 자를 보면 ‘너는 일개 사마가司馬家이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은 사마군실司馬君實(사마광司馬光) 역시 사마가라고 불렀을 것이다.”


역주
역주1 知縣 : 한 縣의 행정을 총괄하는 官名이다. 知县事가 본래 명칭이나 통상 知县이라고 불렀다.
역주2 邸吏 : 수도에 와서 지내며 행정과 연락을 맡아 하는 지방 관원을 말한다.
역주3 鄞令 : 鄞은 會稽縣을 말한다.(≪世說音釋≫) 王安石은 鄞縣 知縣을 지냈다.
역주4 吕氏家塾记 : 吕希哲(1040~1117)이 1권으로 편찬한 雜著類 서적으로, 원본은 산실되었고 송대 이후의 서적 중에 내용 일부가 전한다. 여희철은 字가 原明이고, 呂公著의 长子이다. 학자들은 그를 滎阳先生이라 칭하였다. 그는 宋代의 정치적 문화적으로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가문인 동래여씨 자손으로, 程顥ㆍ程頤ㆍ張載와 교유하였다. 저술로 ≪岁时杂记≫ 2권 등이 있었으나 산실되었다.
역주5 待制 : 官名으로, 唐나라 때 처음 설치되었다. 5품 이상의 관원에게 中書省과 門下省에 숙직하며 황제의 訪問에 대비하게 하였다. 宋나라 때에도 그 제도를 답습하여 殿이나 閣에 모두 待制를 두었으니, 이를테면 保和殿待制, 龍圖閣待制 등속이다. 지위는 學士ㆍ直學士의 아래였다. 황제의 侍從을 담당하고 顧問에 대비하는 일을 하였다.
역주6 參政 : 參知政事의 약칭이다. 참지정사는 唐宋时期에 가장 높은 长官 중 하나로, 同平章事ㆍ枢密使ㆍ枢密副使와 합하여 “宰执”이라 불렀다. 唐나라 때는 中书令ㆍ侍中ㆍ尙書僕射(상서복야) 외에 다른 관원을 宰相职에 임명할 때 “参知政事”를 제수하였다. 宋代에는 参知政事가 副宰相이었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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