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士章
이 爲南康相
注+① 南史曰 “劉繪, 字士章, 彭城安上里人, 劉勔子也. 機悟多能. 初爲齊高帝行參軍, 仕梁, 爲大司馬從事中郎.”에 郡人有姓賴居穢里
한대 投刺謁士章
하니 士章嘲之曰
未審
케라 孔丘何闕而居闕里
注+② 括地志曰 “兗州曲阜西南三里, 有闕里, 中有孔子宅.” 水經注曰 “孔廟東南五百步, 有雙石闕. 故名闕里.”오하다
21-10 【
보補】
유사장劉士章(
유회劉繪)이
의
상相이 되었을 때
注+① ≪남사南史≫에 말하였다. “유회劉繪는 자字가 사장士章이고, 팽성彭城 안상리安上里 사람으로 유면劉勔의 아들이다. 기지가 있고 총명하며 다재다능하였다. 처음에는 제齊 고제高帝(소도성蕭道成)의 행참군行參軍이 되었다가 양梁나라에서 벼슬하여 대사마大司馬의 종사중랑從事中郎이 되었다.” 군인郡人 중에
뇌씨賴氏 성을 가진 사람이
예리穢里에 살고 있었는데 명함을 내밀며 유사장을 찾아왔다. 유사장이 그를 조롱하여 말하였다.
“그대는 얼마나 더럽기에 예리穢里에 사는가?”
“잘은 모르겠으나,
공구孔丘가 어찌 빠지는 것이 있어
궐리闕里에 사셨겠습니까.”
注+② 에 말하였다. “연주兗州 곡부曲阜 서남쪽에 있는 세 마을 중에 궐리闕里가 있으며, 그 마을에 공자의 집이 있었다.”
에 말하였다. “공자묘孔子廟에서 동남쪽으로 500보 떨어진 곳에 한 쌍의 이 있었기 때문에 ‘궐리’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