袁生
은 舉止詳中
注+① 南史曰 “袁憲, 字德章. 幼聰敏好學. 梁武帝開五館, 其一館在憲宅西. 憲招引諸生, 與之談論, 新義出人意表, 同輩咸嗟服焉. 武帝撰孔子正言章句, 詔下國學, 憲十四, 被召爲正言生. 祭酒劉溉愛其神采. 博士周弘正謂憲父君正曰 ‘賢子欲策試不?’ 君正曰 ‘未敢令試.’ 居數日, 君正遣門客與憲候弘正, 會弘正將升講坐, 延憲入室, 授以麈尾, 令憲豎義. 時謝岐․何妥在坐. 弘正曰 ‘二賢雖窮奥賾, 得無憚此後生?’ 何․謝遞起義端, 深極理致, 憲酬對閒敏. 弘正謂妥曰 ‘恣卿所問, 勿以童幼期之.’ 時觀者重沓, 憲神色自若, 辨論有餘. 弘正亦起數難, 終不能屈. 因告客曰 ‘卿還諮袁吳郡. 此郎已堪見代博士矣.’”하니 故有陳汝之風
注+② 氏族志曰 “袁出胡公之後, 陳留․汝南․彭城三望.”이라하다
16-41 【보補】 위위衛尉 조지례趙知禮가 어렸을 때의 원덕장袁德章(원헌袁憲)을 보고 감탄하였다.
“
원생袁生은 행동거지가 침착하고 반듯하니
注+① ≪남사南史≫에 말하였다. “원헌袁憲은 자字가 덕장德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양梁 무제武帝(소연蕭衍)가 을 열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원헌의 집 서쪽에 있었다. 원헌이 학생들을 불러들여 그들과 담론하였는데, 새로운 관점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뛰어넘으니 동료들이 모두 감탄하고 탄복하였다. 무제가 ≪공자정언장구孔子正言章句≫를 찬하고 국학國學에 조서詔書를 내렸는데 〈당시〉 원헌은 14세에 으로 불려갔다. 좨주祭酒인 유개劉溉가 그의 풍모를 아꼈다. 박사博士인 주홍정周弘正이 원헌의 부친 원군정袁君正에게 ‘아드님은 책시策試에 응할 것입니까?’하니 원군정이 ‘아직까지는 응시하라고 감히 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며칠 지나 원군정이 문객門客과 원헌을 주홍정周弘正에게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다. 마침 주홍정은 강좌講坐에 오르려고 하다가 원헌을 강당으로 들어오게 하여 주미麈尾를 주고는 의리義理를 밝혀보게 하였다. 이때 사기謝岐와 하타何妥가 자리에 있었다. 주홍정이 ‘두 현자는 비록 오묘한 이치를 궁구하였으나 이 후생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소?’하니, 하타와 사기가 번갈아가며 의리의 단서를 제기했는데 그 이치가 깊고 지극했다. 원헌의 응대가 여유있으면서도 민첩하니 주홍정이 하타에게 ‘질문을 마음껏 하고 어린아이로 대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이때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을 둘렀는데 원헌은 안색이 평상시와 다름없고 논변에 여유가 있었다. 주홍정도 몇 가지 어려운 문제를 냈으나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 그리하여 〈주홍정이〉 문객에게 ‘그대는 돌아가서 원오군袁吳郡(원군정)과 상의해 보시오. 이 도령은 이미 박사博士를 대신하기에 충분하오.’라고 하였다.” 참으로
진류陳留와
여남汝南의 기풍이 있도다.”
注+② ≪씨족지氏族志≫에 말했다. “원씨袁氏는 의 후예이며, 진류陳留․여남汝南․팽성彭城 세 지역의 망족望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