陶公
이 疾篤
에 都無獻替之言
하니 朝士
가 以為恨
注+① 陶氏敍曰 “侃, 字士行, 其先鄱陽人, 後徙尋陽. 侃少有遠槩, 綱維宇宙之志. 孝廉入洛, 司空張華見而謂曰 ‘後來匡主寧民, 君其人也.’ 劉弘, 鎭沔南, 取爲長史, 謂侃曰 ‘昔吾爲羊太傅叅佐, 見語云 「君後當居身處.」 今相觀, 亦復然矣.’ 累遷湘․廣․荊三州刺史. 加羽葆鼓吹, 封長沙郡公․大將軍. 贊拜不名, 劍履上殿. 進太尉, 贈大司馬, 諡桓公.” 按王隱晉書載侃臨終表曰 “臣少長孤寒, 始願有限, 過蒙先朝歷世異恩. 臣年垂八十, 位極人臣, 當復何恨. 但以餘寇未誅, 山陵未復, 所以憤慨兼懷, 唯此而已. 猶冀犬馬之齒, 尙可少延, 欲爲陛下北呑石虎, 西誅李雄. 勢遂不振, 良圖永息, 臨書腕, 涕泗橫流. 伏願遴選代人, 使必得良才, 足以奉宣王猷, 遵成志業, 則雖死之日, 猶生之年.” 有表若此, 非無獻替.이라 仁祖
가 聞之
注+② 晉陽秋曰 “謝尙, 字仁祖, 陳郡人, 父鯤. 尙齠喪兄, 哀慟過人, 及遭父喪, 溫嶠唁之, 尙號叫極哀, 旣而收涕告訴, 有異常童. 嶠奇之, 由是知名. 仕至鎮西將軍․豫州刺史.” 曰
時無豎刁
라 故
로 不貽陶公話言
注+③ 呂氏春秋曰 “管仲病, 桓公問曰 ‘子如不諱, 誰代子相者. 豎刁何如.’ 管仲曰 ‘自宮以事君, 非人情, 必不可用.’ 後果亂齊.”이라하니
注
劉云 “表辭甚佳. 丈夫本志, 反復略盡, 復何求哉. 若以外臣, 輒及君側, 有非可必於身後. 流俗近言, 非事實.”
4-28
도공陶公(
도간陶侃)이 위독했을 때에 〈정사에 관하여〉 전혀 진언하지 않자
조사朝士들이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
注+① ≪도씨서陶氏敍≫에 말하였다. “도간陶侃은 자字가 이다. 그의 선조는 파양鄱陽 사람인데 후에 심양尋陽으로 이주하였다. 도간은 젊어서부터 원대한 기상과 천하를 경륜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효렴孝廉으로 선발되어 낙양洛陽에 들어갔는데 사공司空 장화張華가 보고는 ‘나중에 군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이니 그대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유홍劉弘이 면남沔南을 진수鎭守하면서 데려다가 장사長史로 삼고 도간에게 ‘옛날 내가 양태부羊太傅(양호羊祜)의 참좌參佐였을 때 〈양태부가 나를〉 보고서 「그대는 나중에 내 자리에 앉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살펴보니 〈그대〉 또한 그러하다.’라고 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상주湘州․광주廣州․형주荊州 세 곳의 자사刺史가 되었다. 가 주어졌으며 장사군공長沙郡公에 봉해지고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태위太尉에 올랐으며 〈사후에〉 대사마大司馬에 추증되고 환공桓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살펴보건대 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 도간의 〈임종표臨終表〉가 실려 있는데 “신은 어릴 때 부친을 여의고 빈한하게 성장하여 처음부터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만, 과분하게 선조先朝부터 여러 대에 걸친 특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신은 나이가 여든에 이르고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에 이르렀으니 임종을 맞이한다 해도 더 이상 무엇이 유감스럽겠습니까. 다만 남아있는 적들을 토벌하지 못하였고 산릉山陵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분하고 걱정스러운 것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그래도 견마犬馬와 같은 신의 목숨을 조금이나마 연장시킬 수 있다면 폐하를 위해 북쪽으로는 석호石虎를 병탄하고 서쪽으로는 이웅李雄을 토벌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형세가 마침내 진작되지 못해 좋은 방책이 영원히 그치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자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삼가 원하건대 대신할 사람을 뽑으시되 반드시 좋은 인재를 얻어 족히 왕도王道를 받들어 펴고 지업志業을 쫓아서 이룰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비록 죽어도 살아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표문表文이 이러하니 진언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인조仁祖(
사상謝尙)가 이를 듣고
注+② ≪진양추晉陽秋≫에 말하였다. “사상謝尙은 자字가 인조仁祖이고 진군陳郡 사람으로, 부친은 사곤謝鯤이다. 사상은 어렸을 때에 형을 잃자 남달리 애통해하였으며, 부친의 상을 당해서는 온교溫嶠가 조문하자 사상은 울부짖으며 극도로 슬퍼하고는 이윽고 눈물을 거두고 호소하였는데 여느 아이들과 달랐다. 온교가 이를 기특하게 여겼고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벼슬이 진서장군鎭西將軍과 예주자사豫州刺史에 이르렀다.” 말하였다.
도간陶侃
“현재
같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도공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注+③ ≪여씨춘추呂氏春秋≫ 〈지접知接〉에 말하였다. “관중管仲의 병이 심해지자 환공桓公이 ‘그대가 만약 죽는다면 누가 그대를 대신하여 재상이 될 자이겠는가? 수조豎刁는 어떠한가?’라고 물으니, 관중管仲이 ‘스스로 거세하여 임금을 섬긴 것은 인지상정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결코 써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후에 과연 제齊나라를 어지럽혔다.”
당시 현자들이 〈이를〉 훌륭한 말이라고 여겼다.
注
◦
유진옹劉辰翁:〈
임종표臨終表〉의 말이 매우 아름답다.
장부丈夫의 본뜻을 반복하며 거의 다 말하였으니 더 이상 무엇을 구하겠는가.
세속에 떠도는 천박한 말은 사실이 아니다.
注
◦ 유신옹劉辰翁:칭찬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난하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