田游巖은 頻召나 不出이라 髙宗이 幸嵩山하여 親至其門하니 游巖이 野服으로 出拜일새 儀止가 謹樸이라 帝가 問
臣
은 所謂泉石膏肓
과 烟霞痼疾
注+① 唐書曰 “田游巖, 京兆三原人. 初補太學生, 後罷歸. 遊太白山, 遇林泉會意, 留連不能去. 母及妻子, 竝有方外之志, 同遊山水二十餘年. 後入箕山, 就許由廟東, 築室而居. 帝後營奉天宮, 游巖先居宮側, 特令勿毁, 仍題曰 ‘士田游巖宅’.”이라하다
5-16【보補】전유암田游巖은 〈황제가〉 자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당唐 고종髙宗(이치李治)이 숭산嵩山에 행행行幸하여 직접 그 집을 이르렀다. 전유암이 야인野人의 복장으로 나와 절을 올렸는데, 위의威儀와 행동이 신중하고 소탈하였다. 황제가 물었다.
“신은 이른바
입니다.”
注+① ≪신당서新唐書≫ 〈은일전隱逸傳〉에 말하였다. “전유암田游巖은 경조京兆 삼원三原 사람이다. 처음에는 태학생太學生으로 뽑혔다가 뒤에 그만두고 돌아갔다. 태백산太白山을 유람하다가 마음에 드는 은거할 곳을 만나서는 머물며 떠나지를 못했다. 모친과 처자도 모두 속세를 떠나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같이 산수를 20여 년간 유람하였다. 뒤에 기산箕山에 들어가 허유許由의 사당 동쪽에 집을 짓고 살았다. 황제가 뒤에 봉천궁奉天宮을 지었는데, 전유암이 전부터 궁의 옆에 살았기에 특별히 허물지 못하게 하고 이어서 ‘처사전유암택處士田游巖宅’이라고 편액을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