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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魏나라 조정에서
진晉 문왕文王(
사마소司馬昭)을
공公에 봉하고
구석九錫의 예를 갖추었으나 진 문왕이 극구 사양하면서 받지 않자,
공경公卿과
장교將校들이 진 문왕의 관서에 나아가 〈수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권유하였다.
사공司空 정충鄭冲이
注+① 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 말하였다. “정충鄭冲은 자字가 문화文和로, 형양滎陽의 개봉開封 사람이다. 실질적이면서도 노련한 재주가 있고, 마음이 깨끗하고 욕심이 적으며, 경서의 내용과 역사의 사실을 논의하기 좋아하고, 풀을 엮어 만든 옷이나 솜을 넣은 〈허름한〉 옷을 입고 살아도 그것을 근심거리로 여기지 않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사도司徒와 태보太保에 이르고, 진晉나라가 〈위魏나라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은 뒤에 태부太傅로 승진하였다.” 사신을 급파하여
완적阮籍에게
을 요청했는데, 완적은 당시에
원효니袁孝尼(
원준袁準)의 집에 있으면서
注+② ≪원씨세기袁氏世紀≫에 말하였다. “원준袁準은 자字가 효니孝尼로, 진군陳郡의 양하陽夏 사람이다. 부친 원환袁渙은 위魏나라에서 낭중령郎中令을 역임하였다. 원준은 진실되고 미더우며, 정도正道를 준수하고 타인이 자신보다 뛰어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세상일에 험난함이 많았기 때문에 잠자코 물러나 감히 관직에 나아가기를 구하지 않았다. 지은 글이 10만여 언言에 이른다.”
순작荀綽의 〈연주기兗州記〉에 말하였다. “원준은 뛰어난 재주를 지녔고, 태시太始 연간(265∼274)에 급사중給事中의 지위에 올랐다.” 어제 마신 술이 깨지 않은 상태였다. 〈그를〉 부축하여 일으키자
에 써서 문장을 지었는데, 수정할 부분이 없어서 그대로 필사하여 사신에게 주었다. 당시 사람들이
신필神筆이라고 하였다.
注+③ 고개지顧愷之의 〈진문장기晉文章記〉에 말하였다. “완적阮籍의 〈권진문勸進文〉은 호방하여 광대한 운치가 있는데, 문장이 전환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천천히 수습하여 갈무리하였다.”
어떤 판본의 주석에 말하였다. “완적의 〈권진문〉의 대략적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들으니, 명공明公(진晉 문왕文王)께서 강하게 사양하시니 정충鄭冲 등이 애타게 그리워하여 실로 우직한 충심을 품고 있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성왕聖王께서 제정하신 제도는 백대가 지나도 전통이 같으니, 덕이 있는 사람을 표창하고 공이 있는 사람에게 상을 내리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주공周公께서도 이미 이룩한 공업을 바탕으로 삼고, 이미 국가를 안정시킨 형세에 의거하여 명공께서는 마땅히 성상의 칙지를 받들어 이 큰 복을 받으셔야 합니다.’”사마소司馬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