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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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龐士元 至吳하니 吳人 竝友之注+① 蜀志曰 “周瑜領南郡, 士元爲功曹. 瑜卒, 士元送喪至吳, 吳人多聞其名, 及當還西, 竝會閶門, 與士元言.”하다 見陸績注+② 文士傳曰 “績, 字公紀. 幼有儁朗才數, 博學多通. 龎士元年長於績, 共爲交友. 仕至鬱林太守. 自知亡日, 年三十二而卒.” 顧劭 全琮注+③ 環濟吳紀曰 “琮, 字子, 吳郡錢塘人. 有德行義槩, 爲大司馬.”하고 而為之目曰
陸子 所謂駑馬有逸足之用이요 顧子 所謂駑牛可以負重致遠이라하다
或問
如所目이면 陸為勝邪아하니
駑馬雖精速이나 能致一人耳 駑牛一日行百里로되 所致豈一人哉리오하니
吳人無以難하다
全子 好聲名하여 似汝南樊子昭注+④ 蔣濟萬機論曰 “許子將褒貶不平, 以拔樊子昭而抑許文休. 劉曄難曰 ‘子昭拔自賈豎, 年至七十, 退能守靜, 進不苟競.’ 濟答曰 ‘子昭誠自幼至長, 容貌完潔. 然觀其揷齒牙, 樹頰頦, 吐脣吻, 自非文休之敵.’”라하다
【頭註】
劉云 “亦捷急變化語, 卽駿馬所致, 亦如此耳.”


17-9 방사원龐士元(방통龐統)이 나라에 이르자 오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와 벗을 맺었다.注+①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에 말했다. “주유周瑜남군南郡을 다스릴 때 방사원龐士元공조功曹였다. 주유가 죽자 방사원이 나라까지 영구를 호송했었는데, 오나라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많이 들었기에 〈그가〉 서쪽으로 돌아갈 때에 모두 창문閶門에 모여 방사원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사원이〉 육적陸績고소顧劭전종全琮注+② ≪문사전文士傳≫에 말했다. “육적陸績공기公紀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총명함과 재주가 있었으며 박학하고 두루 통달하였다. 방사원龎士元은 나이가 육적보다 많았는데 함께 친구를 맺었다. 벼슬은 울림태수鬱林太守에 이르렀다. 죽는 날을 스스로 알았는데 32세에 죽었다.”注+환제環濟의 ≪오기吳紀≫에 말했다. “전종全琮자황子黃으로 오군吳郡 전당錢塘 사람이다. 덕행德行기개氣槪가 있었고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보고 그들에 대한 품평을 했다.
선생은 이른바 ‘둔한 말도 발이 빠른 쓸모가 있다’는 경우이고, 선생은 이른바 ‘둔한 소도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 갈 수 있다.’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품평대로라면 육 선생이 더 낫다는 것입니까?”
〈방사원이〉 말했다.
“둔한 말은 비록 몹시 빠르기는 하지만 한사람만 태울 수 있을 뿐입니다. 둔한 소는 하루에 백리만 가지만 나르는 사람이 어찌 한사람 뿐이겠습니까.”
〈이 말에 대해〉 오나라 사람들이 아무도 논란하지 않았다. 〈방사원이 또 품평했다.〉
선생은 명성을 좋아하여 마치 여남汝南번자소樊子昭 같습니다.”注+장제蔣濟의 ≪만기론萬機論≫에 말했다. “허자장許子將(허소許劭)은 〈인물에 대한〉 평가가 공평하지 못했으니 번자소樊子昭를 발탁하고 허문휴許文休(허정許靖)를 물러나게 했기 때문이다. 유엽劉曄이 〈이런 생각에 대해〉 반론하며 ‘번자소는 장사치에서 발탁되었는데 나이가 칠순에 이를 때까지 〈조정에서〉 물러나서는 조용하게 지낼 수 있었으며 〈조정에〉 나아가서는 함부로 사람들과 다투지 않았습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번자소는 참으로 어려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용모는 바르고 고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남의 말에 끼어들어 볼을 부풀리고 입술을 뒤집으며 격렬히 말하는 것을 보건대 처음부터 허문휴의 상대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두주頭註
유진옹劉辰翁:또한 급하게 바꾼 말이다. 준마駿馬가 태워도 이와 같을 뿐이다.


역주
역주1 : ≪三國志≫․≪續後漢書≫․≪太平御覽≫ 등에는 모두 ‘璜’으로 되어 있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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