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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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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氏語林舊序二首
何氏語林三十卷 吾友何元朗氏之所編이니 類倣劉氏世說而作也 劉義慶氏 採擷漢晉以來理言遺事하여 論次爲書한대 摽表揚確하고 奕奕玄勝이라
自玆以還으로 稗官小說 無慮百數로대 而此書特爲雋永하고 精深奇逸하니 莫或繼之
元朗 雅好其書하여 研尋演繹 積有歲年하되 覽篇籍하고 思企芳躅하여 昉自兩漢으로 迄於胡元 上下千餘年 正史所列 傳記所存 奇蹤勝踐 漁獵靡遺하니 凡二千七百餘事 總十餘萬言이라
類列義例 一惟劉氏之書로대 而凡劉所已見 則不復出이라 品目昈分 雖三十有八이나 而原情執要 寔惟語言爲宗이라 單詞隻句 往往令人意消하고 思致淵永하여 足深唱歎하니 誠亦至理攸寓文學行義之淵也어늘
而或者以爲摭裂委瑣하여 無所取裁 骫骳偏하여 獨能發藻飾詞하고 於道德性命 無所發明이라
嗚呼 事理無窮하니 學奚底極 理或不明하면 固不足以探性命之蘊하고 而辭有不達이면 道何從見 是故 博學詳說 聖訓攸先이요 修辭立誠 蓄德之源也
宋之末季 學者牽於性命之說하여 深中厚黙하고 端居無爲하여 謂足以涵養性眞하고 變化氣質이나 而考厥所存하면 多可議者하니 是雖師授淵源이라도 惑於所見하고 亦惟簡便日趨하면 偷薄自畫하고 假美言하여 以護所不足하고 甘於面墻이로대 而不自知其堕於庸劣焉爾
嗚呼 翫物喪志之一言 遂爲後學之深痼하니 君子蓋嘗惜之 元朗 於此 眞能不爲所惑哉인저
元朗 貫綜深博하고 文詞粹精하여 見諸論撰 偉麗淵宏하여名世하니 此書 特其緒餘耳 輔談式藝하니 要亦不可以無傳也
辛亥四月之望 文徵明하노라
華亭何元朗 儗劉氏世說하여 作語林成 翰林待詔文公 旣爲序之以傳矣한대 又以示師道하여 俾志其末簡이라
予惟世說 紀述漢晉以來佳事佳話하여 以垂法戒한대 而選集淸英하여 至爲精絶이라 故房許諸人收晉史者 往往用以成篇이어늘 不知唐藝文志 何故乃列之小說家
蓋言此書非實錄者 自劉知幾始하니 而不知義慶去漢晉未遠하여 其所述載 要自有據 雖傳聞異詞 抑揚緣飾하여 不無少過 至其言世代崇尙하고 人士風流하여는 百世之下 可以想見하니 不謂之良史 不可也
豈直與志怪述稽神纂異誣誕慌惚之談으로 類哉리오 是故 齊梁以來 學士大夫 恒喜言之하고 宗工鉅儒 往往爲之註釋綴續하고 敍錄刪校하니 尊信益衆 而此書亦益顯이라
於是 有儗之而作唐語林 續世說者矣로대 然或止紀一姓하고 或僅載數朝하여 固未及貫綜百代하고 統論千祀也어니와 其所採擷 亦終不能如劉氏之精이라
而元朗 乃獨上泝西京하고 下逮朔漠하여 悉取其精深玄遠之言 瓌詭卓絶之跡하여 聚而陳之하되 而劉氏所遺 更加搜抉하고 翦裁屬比하여 嚴約整潔 不下前書하니 自非博雅通方之士 其孰能與於斯哉리오
抑義慶 宗王牧將으로 幕府多賢하니 當時如袁淑 陸展 鮑照 何長瑜之徒 皆一世名彦이어늘 爲之佐吏하니 雖曰筆削自己 而檢尋贊潤 夫豈無人이리오
若元朗 則藏器海濱하여 明經應擧로대 而不以帖括佔𠌫 奪所嗜好하고 紬繹會萃 不仰同志하니 校之劉氏 難易豈啻什百哉리오
況世說精絶 亦由孝標作註 詳援確證하여 有不言之妙한대 顧事出二手하여 作述不同이로대
而元朗所註 乃一時竝撰하여 綱目互發하고 詳略相成하며 開闔貫通하여 一無抵牾 至其所引하여는 奧篇秘典 靡不具列하여 視之劉氏 富贍略等하니 信該洽之鉅觀이요 而文筆之弘致也
而說者顧以其多取近世襍家하여 頗傷玄雅하고 而又以鞮譯之士 厠之中하여 夏幾不分하여 虎羊之鞹爲疑하니 不知元朗之志 在於法戒하니 則不得不兼取久近而具列焉이라
耶律 蒙古 近而可徵하니 盖所謂商監秦喩也어늘 惡得而舍諸 若夫其文則史 隨世汙隆者 又安能盡汰之哉
元朗之敍言語篇 固自謂 玄虚簡遠 不得盡同劉氏라하니 覽者可自得之矣 元朗著述大方 已詳文序하여 予獨論其與世說 所以同異者著之하고 亦以白作者之苦心云爾
長洲陸師道하노라


하씨어림何氏語林≫ 옛 서문 2수
1.
≪하씨어림≫ 30권은 나의 친구 하원랑何元朗(하량준何良俊)이 편찬한 것이니, 유씨劉氏(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처음에 유의경이 나라와 나라 이후의 이언理言(의론議論)과 유사遺事를 채집하여 논차論次하여 책을 만들었는데, 〈은미한 뜻을〉 겉으로 드러내고 분명하게 밝히며 확연히 세속을 초월하였다.
이로부터 패관소설稗官小說이 무려 백으로 헤아릴 정도로 많아졌으나 이 책이 특히 뛰어나서 그 정교하고 심오하며 진기하고 초탈함은 어떤 책도 이를 계승할 수 없었다.
하원랑이 평소 이 책을 좋아하여 여러 해 동안 깊이 탐구하고 연역演繹하였으며 서책들을 찾아서 열람하여 전현前賢의 자취를 따르고자 노력하여, 양한兩漢으로부터 시작하여 나라에 이르기까지 상하 천여 년에 걸쳐 정사正史에 열거한 내용과 전기傳記에 남아 있는 진기한 사적과 뛰어난 자취를 남김없이 수집하니, 무려 2,700여 가지 일화에 총 10여 만 자에 달하였다.
유별類別로 나열한 체재는 한결같이 유씨의 책을 따랐으나, 유씨가 이미 보여준 것은 중복하여 싣지 않았다. 항목은 비록 38개로 나눴으나 근원을 추구하고 중점을 둔 것은 사실 〈언어言語〉편이 으뜸이다. 한마디 말이나 짧은 구절이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의〉 뜻을 잊게 하고 생각을 깊은 곳에 이르게 하여 족히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하니, 참으로 이 책 또한 지극한 이치가 깃든 문학과 행의行義의 저장고이다.
그러나 혹자는 이 책이 자잘한 일들을 주워 모아 취할 만한 점이 없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편벽되고 뒤섞여 있어, 오직 문사를 수식하는 데만 빛을 발하고 도덕과 성명性命에 대해서는 밝혀낸 점이 없다고 평가하였다.
아, 사물의 이치는 무궁하니 배움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치에 혹 밝지 못하면 실로 성명性命의 깊은 뜻을 탐구하기에 부족하고, 말에 통달하지 못하면 를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나라 말기에 학자學者들이 성명설性命說에 이끌려 마음속으로 묵묵히 침잠하고 단정히 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도 진성眞性을 함양하고 기질氣質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그 마음에 보존한 것을 살펴보면 비난할 만한 점이 많다. 아무리 스승이 연원淵源에 대해 전수하더라도 자신이 본 것에 미혹되고 또 간편한 것만을 나날이 추구한다면, 경박하게 스스로 한계를 짓고 아름다운 말로 가장하여 부족한 점을 옹호하며, 자신이 용렬한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을 알지 못하게 마련이다.
아, 이 마침내 후학들의 깊은 고질병이 되었으니 군자가 예전에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원랑은 이에 대해 참으로 미혹되지 않을 수 있었다. 원랑은 이치를 꿰뚫어 알고 학식이 깊고 넓었으며, 문사가 순수하고 정밀하여 저술에 나타낸 것이 매우 아름답고 심오하여 저절로 세상에 이름날 만하였으니, 이 책은 단지 그 부산물일 뿐이다. 〈이 책은〉 담론을 돕고 문예의 규식이 되니 요컨대 또한 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신해년辛亥年(1551) 4월 15일에 문징명文徵明이 쓰다.
2.
화정華亭 하원랑何元朗(하량준何良俊)이 유씨劉氏(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를 모방하여 ≪하씨어림≫을 편찬하고, 완성되자 한림대조翰林待詔 문공文公(문징명文徵明)이 이미 서문을 지어주어 전해지고 있는데, 또 나(육사도陸師道)에게 보여주며 책의 말미에 기록하게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세설신어≫는 나라와 나라 이후의 아름다운 일화와 담론을 기술하여 교훈을 전하였는데, 깨끗하고 빼어난 내용을 선별 수집하여 지극히 정묘하고 뛰어났다. 그러므로 등 여러 사람이 진사晉史(≪진서晉書≫)를 편찬할 때 종종 이 책을 사용하여 성편成篇하였던 것인데,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는 무슨 이유에서 이 책을 소설가류小說家類 속에 나열하였는지 모르겠다.
대개 그는 유의경이 한나라와 진나라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에 살아 기록한 내용들이 자연히 근거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비록 전해들은 말과 특이한 글을 조정하거나 수식하는 약간의 잘못이 있긴 하나, 한 시대가 숭상한 것과 인사들의 풍류를 말한 점에서는 백세 뒤에 이를 상상해볼 수 있게 하였으니, 이 책을 양사良史라고 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나라와 나라 이후로 학사대부學士大夫가 늘 이 책을 즐겨 언급하였고, 종사宗師대유大儒가 왕왕 이 책의 주석을 내거나 속편續編을 내고 서록敍錄하거나 교감하였던 것이니, 신뢰하는 이가 많아질수록 이 책도 더욱 유명해졌다.
이에 이것을 모방하여 ≪당어림唐語林≫․≪속세설續世說≫이 만들어졌으나, 혹은 한 성씨姓氏의 기록에 그치고 혹은 겨우 몇몇 왕조를 수록하는 데 그쳐 백 세대를 꿰뚫어 종합하고 천 년을 통합하여 논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였고, 채록한 내용도 유씨만큼 정밀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하원랑만이 유독 위로 서경西京(서한西漢)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아래로 에 이르기까지 심오하고 현원玄遠한 담론과 기이하고 특출한 사적들을 모두 수집하여 기술하되, 유씨가 빠뜨린 것은 더욱 찾아내고 비슷한 것은 잘라내서 엄정하고 정돈된 것이 전서前書(≪세설신어≫)에 못지않았으니, 그 자신이 박식하여 두루 통달한 선비가 아니고서야 어느 누가 여기에 참여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유의경은 종실의 일원이고 수령이어서 막하에 유능한 인재들이 많았다. 당시에 원숙袁淑육전陸展포조鮑照하장유何長瑜와 같은 무리는 모두 당대의 이름난 인물들이었는데, 이들을 좌리佐吏로 삼았으니 비록 필삭筆削을 자신이 하였다고 하나 점검하고 도와준 이가 어찌 없었겠는가.
하원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바닷가에서 기량을 닦아 명경明經으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을 외우느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버리지도 않았고 일화를 수집해달라고 동지들에게 부탁하지도 않았으니, 유씨와 견주어볼 때 그 어려움이 어찌 열 배, 백 배 뿐이었겠는가.
더구나 ≪세설신어≫가 정묘하고 뛰어나게 된 것은 유효표劉孝標가 낸 가 자세하고 확실하여 말할 수 없는 묘미가 생긴 덕택이기도 한데, 일이 두 사람에 의해 이루어져 편찬과 주석이 균일한 솜씨가 아니다.
하지만 하원랑이 낸 주석은 일시에 같이 편찬되어 강목綱目이 서로 호응하고, 자세하고 소략한 정도가 서로 맞고, 펼치고 수습하는 것에 원칙이 있어 전혀 어그러짐이 없다. 그가 인용한 것으로 말하면, 진기하고 심오한 서적들을 모두 갖추어 열거하고 있어 유씨와 비교할 때 내용의 풍부한 정도가 거의 대등하니 참으로 해박함으로 이룬 큰 볼거리요, 문필의 위대한 결과물이다.
그런데 비평하는 이 중에는 도리어 이 책이 대부분 근세의 잡가雜家에서 일화를 많이 취하여 〈≪세설신어≫가 지닌〉 간결함과 아정雅正함을 상당히 손상시킨 문제가 있으며, 또 중화中華에 섞어 두어 오랑캐와 중화인이 구분되지 않게 함으로써 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이는 하원랑의 의도가 교훈을 전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에 먼 시대나 가까운 시대의 일들을 다 취하여 열거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는 시대가 가까워 징험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인데 어찌 그것을 버릴 수 있었겠는가. 그 문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역사 기록이니, 〈역사란〉 시대에 따라 부침浮沈이 있게 마련인데 또 어찌 다 없앨 수 있었겠는가.
이 책을 읽는 자라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하원랑의 저술 원칙은 이미 서문에서 상세하게 밝혔으니 나는 다만 이 책이 ≪세설신어≫와 어떤 점이 같고 다른지에 대해 논하여 밝힐 뿐이고, 또 이 책을 지은 자가 고심한 점에 대해 말할 뿐이다.
장주長洲가 짓다.


역주
역주1 널리……것이며 : ≪孟子≫ 〈離婁 下〉에 “널리 배우면서 상세히 해설하는 목적은 장차 이를 돌이켜서 요약적으로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博學而詳說之 將以反說約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
역주2 말을……것이다 : 孔子가 “군자는 덕을 진보시키고 학업을 닦나니, 忠과 信이 덕을 진취시키는 것이요, 말을 함에 있어서 성실하게 하는 것이 학업을 保有하는 것이다.[君子進德修業 忠信 所以進德也 修辭立其誠 所以居業也]”라고 하였다.(≪周易≫ 乾卦 〈文言傳〉)
역주3 기꺼이……있으면서도 : 원문은 “甘於面墻”인데 여기서 面墻은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면 마치 낯을 담에다 대고 선 것과 같이 답답하다는 말이다. ≪書經≫ 〈周書 周官〉에 “배우지 않으면 낯을 담에 댄 것과 같다.”는 말이 있고, 또한 ≪論語≫ 〈陽貨〉에서 孔子가 아들 伯魚에게 한 말에도 이러한 내용이 있다.
역주4 좋아하는……말 : ≪書經≫ 〈周書 旅獒〉의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덕을 잃고, 좋아하는 사물에 빠지면 뜻을 잃는다.[玩人喪德 玩物喪志]”에서 인용한 말이다.
역주5 : ‘搜’자와 같은 글자이다.
역주6 (駿)[駮] : 저본에는 ‘駿’으로 되어 있으나, 사고전서본 ≪何氏語林≫과 文徵明의 ≪甫田集≫에 의거하여 ‘駮’으로 바로잡았다. ‘駿’과 ‘駮’의 글자가 비슷하여 잘못된 듯하며, ‘駮’은 ‘駁’과 같다.
역주7 (目)[自] : 저본에는 ‘目’으로 되어 있으나, 사고전서본 ≪何氏語林≫과 文徵明의 ≪甫田集≫에 의거하여 ‘自’로 바로잡았다.
역주8 房玄齡 : 579~648. 이름은 喬이고 字는 玄齡이며 齊州(지금의 相公庄鎭) 臨淄 사람이다. 唐나라 초기의 명재상이며 정치가이다. 詩文에 능하였고 經史를 두루 섭렵하였다. 秦王 李世民을 보좌한 謀士 중 한 사람이며, 唐太宗 즉위 후에 中書令에 오르고 邢國公에 봉해졌다. 조정의 일을 총괄하고 정무를 20년간 훌륭하게 처리하였고, 당나라의 典章制度를 제정하고 ≪唐律疏議≫ 등의 율령을 편찬하였으며, ≪高祖實錄≫․≪太宗實錄≫․≪晉書≫ 등의 史書를 감수하였다. 杜如晦와 함께 명재상의 전범으로 꼽혀 ‘房․杜’로 병칭된다.(≪舊唐書≫ 〈房玄齡傳〉, ≪新唐書≫ 〈房玄齡傳〉)
역주9 許敬宗 : 592~672. 唐나라 때의 政治家이자 歴史家이다. 字는 延族이고, 高陽郡(지금의 河北省) 新城縣 사람이다. ≪高祖實錄≫, ≪文館詞林≫, ≪西域圖志≫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학적인 재주는 뛰어났으나 好色하고 탐욕스러웠으며 냉혹하고 잔인한 인물이었다고 한다.(≪舊唐書≫ 〈許敬宗傳〉)
역주10 이 책이……시작되었으니 : 劉知幾의 ≪史通≫ 〈采撰〉에 보인다.
역주11 어찌……같겠는가 : 여기에 기술된 책들은 ≪世說新語≫와 함께 小說家類로 분류되어 있는 서적들이다. ≪志怪≫는 祖台之가 편찬한 것(2권)과 孔氏가 편찬한 것(4권)이 있고, ≪述異記≫ 10권은 祖沖之, ≪稽神錄≫ 10권은 徐鉉, ≪纂異記≫ 1권은 李玟이 편찬하였다.(≪隋書≫ 〈經籍志〉, ≪新唐書≫ 〈藝文志〉, ≪宋史≫ 〈藝文志〉)
역주12 朔漠 : 元朝를 말한다. 元이 북방의 사막지대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삭막이라 불렀다.(≪世說音釋≫)
역주13 帖括 : 唐代에 帖經의 응시자가 經書의 難語句를 뽑아 모아 노래와 같이 만들어 기억하게 좋게 만든 것을 말한다. 대개 科擧에 응시하기 위한 文章을 암기하는 것을 뜻하며 明淸시대에는 八股文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世說音釋≫)
역주14 譯官인 선비 : 원문은 ‘鞮譯之士’인데, 역관인 선비를 가리킨다. ≪禮記≫ 〈王制〉에, “동방을 奇, 남방을 象, 서방을 狄鞮, 북방을 譯이라 하는데, 이는 사방 외국의 통역을 맡은 관원이다.”라고 하였다.
역주15 범과……만들었다 : 원문은 ‘虎羊之鞹’인데, 여기서 ‘鞹’은 ‘털 벗긴 가죽’ 또는 ‘무두질한 가죽’을 말한다. ≪論語≫ 〈顏淵〉 편에서 춘추시대 衛나라 大夫 棘子成이 “범이나 표범의 털 벗긴 가죽은 개나 양의 털 벗긴 가죽과 같다.[虎豹之鞹 猶犬羊之鞹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16 耶律과 蒙古 : 耶律은 遼나라의 姓이고, 元나라 태조의 선조는 蒙古部의 首長이었다. 여기서 야율은 요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몽고는 원나라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고 보았다.(≪世說音釋≫)
역주17 商나라를……것 : 殷(商)나라는 前代인 夏나라를 거울로 삼고, 漢나라는 전대인 秦나라를 교훈 삼는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何氏語林≫의 저자인 何良俊이 이민족이 세운 遼나라․元나라 때의 일화도 자신의 책에 포함시켜 교훈을 주려 하였다고 옹호하는 말이다.
역주18 하원랑이……말했으니 : 何良俊은 ≪何氏語林≫ 〈言語〉편에서, ≪世說新語≫를 모방하여 ≪하씨어림≫을 편찬하였으나 후대로 갈수록 서책이 없어지고 기록이 사라지게 될까 두려워 ≪세설신어≫처럼 현허하고 간원한 것만 싣지 않고 여러 서적들에 나오는 기록들을 두루 포함시켰으므로 그 점에서는 ≪세설신어≫와 똑같지 않다고 기술하였다.
역주19 陸師道 : 1517~1574. 字는 子傳이고, 號는 元洲․五湖이며, 南直隸 長洲縣(지금의 江蘇 蘇州市) 사람이다. 明나라 嘉靖(1522~1566) 연간의 저명한 學士, 詩人, 畫家, 書法家이다. 1538년에 進士가 되어 工部主事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뒤 모친 봉양을 이유로 귀향하여 14년간 은거하였다. 文徵明을 스승으로 모시고 弟子라 자칭하였다. 詩․畵․小楷․文章에 모두 뛰어나 사람들이 “徵明四絕”이라 하였다.(≪明史≫ 〈文苑 三〉)
역주20 (妖)[異] : 저본에는 ‘妖’로 되어 있으나, ≪世說音釋≫과 ≪新唐書≫ 〈藝文志〉 등에 의거하여 ‘異’로 바로잡았다.
역주21 (古) : 저본에는 ‘古’가 있으나, 安永本과 ≪世說箋本≫에 의거하여 삭제하였다.
역주22 [夷] : 저본에는 ‘夷’가 없으나, 安永本과 ≪世說箋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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