羊秉
은 為撫軍叅軍
이러니 少亡
이나 有令譽
注+① 羊秉敍曰 “秉, 字長達, 山平陽人, 漢南陽太守續曾孫. 大父魏郡府君, 即車騎掾元子也. 府君夫人鄭氏無子, 乃養秉. 齠齔而佳, 小心敬愼. 十歲而鄭夫人薨, 秉思容盡哀. 俄而公府掾及夫人並卒, 秉群從父率禮相承, 人不間其親, 雍雍如也. 仕參撫軍將軍事, 將奮千里之足, 揮沖天之翼, 惜乎春秋三十有二而卒. 昔罕虎死, 子産以爲無與爲善, 自夫子之沒, 有子産之歎矣. 亡後有子男又不育, 是何行善而禍繁也. 豈非司馬生之所惑與.”라 夏侯孝若
이 為之敍
注+② 文士傳曰 “湛, 字孝若, 譙國人, 魏征西將軍淵曾孫也. 有盛才, 文章巧思, 善補雅詞, 名亞潘岳. 歷中書侍郞.”하여 極相讚悼
하다 羊權
이 為黄門侍郎
하여 侍簡文坐
일새 帝問曰
夏侯湛
이 作羊秉敍
하니 絶可想
이라 是卿何物
이며 有後不
注+③ 羊氏譜曰 “權, 字道輿, 徐州刺史悅之子也. 仕至尙書左丞.”아하니
亡伯은 令聞이 夙彰이나 而無有繼嗣라 雖名播天聽이나 然胤絶聖世라하니
4-48
양병羊秉은
무군장군撫軍將軍(
동진東晉 간문제簡文帝 사마욱司馬昱)의
참군參軍이 되었는데 일찍 죽었으나 명성이 높았다.
注+① 〈양병서羊秉敍〉에 말하였다. “양병羊秉은 자字가 장달長達이고 태산泰山 평양平陽 사람이다. 한漢나라 남양태수南陽太守 양속羊續의 증손曾孫이다. 조부(양비羊秘)는 위군부군魏郡府君이었다. 양병은 바로 차기연車騎掾(양요羊繇)의 장남이다. 그런데 〈조모인〉 부군부인府君夫人 정씨鄭氏에게 아들이 없어서 이에 양병을 양자로 삼았다. 어려서부터 뛰어났으며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10세에 정부인鄭夫人이 죽자 양병은 마음으로도 낯빛으로도 지극히 애통해하였다. 얼마 후 〈생부인〉 공부연公府掾(거기연인 양요)과 부인이 함께 죽자 양병과 여러 백부․숙부들은 예법에 따라 서로 계승하여 사람들이 그 친목함에 이의를 달지 못하였고 일족이 화목하였다. 무군장군撫軍將軍(사마욱司馬昱)의 참군參軍으로 벼슬하여 장차 천 리를 내달리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려고 하였는데 애석하게도 서른두 살에 죽고 말았다. 부자夫子(양병)가 죽고 나서 〈사람들이〉 자산이 했던 것처럼 탄식하였다. 죽은 뒤에 아들이 있었지만 또 요절하였으니, 어찌하여 선을 행하였는데 재앙이 빈번한 것인가. 이 어찌 가 아니겠는가.” 하후효약夏侯孝若(
하후담夏侯湛)이 그를 위해
서敍를 지어
注+② ≪문사전文士傳≫에 말하였다. “하후담夏侯湛은 자字가 효약孝若이고 초국譙國 사람으로 위魏나라 정서장군征西將軍 하후연夏侯淵의 증손曾孫이다. 재주가 뛰어났는데 문장이 뛰어나고 생각이 치밀했으며 우아한 문사文辭를 잘 지어 이름이 반악潘岳에 버금갔다. 중서시랑中書侍郞을 역임했다.” 지극하게 찬미하고 애도하였다.
양권羊權이
황문시랑黄門侍郎이 되어
간문제簡文帝(사마욱)를 모시고 앉았는데, 간문제가 물었다.
“하후담이 〈
양병서羊秉敍〉를 지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경과는 어떤 관계이며 후손은 있는가?”
注+③ ≪양씨보羊氏譜≫에 말하였다. “양권羊權은 자字가 도여道輿이고 서주자사徐州刺史 양열羊悅의 아들이다. 벼슬이 상서좌승尙書左丞에 이르렀다.”
“돌아가신 백부는 명성이 일찍 알려졌으나 후사가 없습니다. 비록 이름이 성상의 귀에까지 들어갔지만 자손은 성세聖世에 끊어졌습니다.”
注
◦ 응등應登:〈‘하물何物’의〉 ‘물物’자는 ‘친親’으로 해석한다.
注
◦ 유진옹劉辰翁:〈이〉 말 한마디를 추가했기 때문에 슬프고 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