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熈載
注+① 湘山野錄曰 “韓熈載, 字叔言, 本靑人. 事江南三主, 時謂之神仙中人. 風彩照物, 每縱轡春城秋苑, 人皆隨觀. 談笑則聽者忘倦, 審音能舞, 善八分及畵筆, 皆冠絶. 簡介不屈, 擧朝未嘗拜一人. 多嘉納. 吉凶儀制不如式者, 隨事稽正, 制誥典雅, 有元和之風. 屢欲相之, 爲宋齊丘深忌, 終不進用.”在南唐
일새 多置女僕
하고 晝夜歌舞
라 語人云
中原常虎視於此
하니 一旦眞主出
하면 江南
은 棄甲不暇
리니 吾不能爲千古笑端
注+② 南唐書曰 “熈載在南唐, 盡忠直言, 後房妓妾, 不加檢束, 恣其出入. 後主屢欲相之, 而惡其如此, 乃左授右庶子, 分司於外. 熈載上表乞留, 盡出群婢, 後主乃喜, 以爲秘書監. 群婢復集如初.이라하다
14-33 【
보補】
한희재韓熈載가
注+① ≪상산야록湘山野錄≫에 말하였다. “한희재韓熈載는 자字가 숙언叔言이고, 본래 청주靑州 사람이다. 강남의 를 섬겼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를 신선중인神仙中人이라 불렀다. 풍채가 사물을 빛나게 하여 말고삐를 휘두르며 봄가을에 성城이나 동산을 다니면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라다니며 구경하였다. 그가 말하거나 웃으면 듣는 사람이 피곤을 잊었고, 음악을 알고 춤에 능하였으며 과 서화書畵를 잘하여 모두 으뜸이었다. 꼿꼿하고 굽히지 않아 조정 전체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절을 한 적이 없었다. 건의하는 일마다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길례와 흉례 중에 법식과 같지 않은 것은 일이 생길 때마다 바로잡았으며, 그가 지은 제고制誥는 전아典雅하여 이 있었다. 여러 차례 그를 재상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송제구宋齊丘가 그를 매우 시기하여 끝내 재상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에 있을 때 여종들을 많이 두고 밤낮으로 춤추고 노래하였다.
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재상으로 들어오라는 명을 피하려고 해서입니다.”
“
이 항상 이곳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어느 날 〈중원에서〉 진정한 군주가 나오면
강남江南은 갑옷을 버릴 겨를조차 없을 것이니, 나는
천고千古의 웃음거리가 될 수 없어서입니다.”
注+② 에 말하였다. “한희재韓熈載가 남당南唐에 있을 때 충심을 다하고 직언을 하였으나 후방後房의 기첩妓妾들을 단속하지 않아 그들이 멋대로 출입하였다. 후주後主가 여러 차례 그를 재상으로 삼고 싶었으나, 그의 이와 같은 행실을 싫어하여 마침내 좌천시켜 우서자右庶子에 임명하여 지방에 분사分司하게 하였다. 한희재가 표문을 올려 그대로 있게 해달라고 빌고 여종들을 다 내보내자, 후주가 마침내 기뻐하여 비서감秘書監에 임명하였다. 여종들이 다시 처음처럼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