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汜
注+① 襄陽耆舊傳曰 “許汜是楊慮同里人. 少師慮, 爲魏武從事中郞. 昔在劉表坐, 論陳元龍者, 其人也.”가 與劉玄德
注+② 續漢書曰 “劉備, 字玄德, 涿郡人, 漢景帝子中山靖王勝之後.”으로 並在劉荊州坐
注+③ 英雄記曰 “劉表, 字景升, 山陽高平人, 魯恭王之後. 領荊州牧. 身長八尺, 姿貌溫偉, 與張儉等號爲八顧.”하여 共論人物
이러니 許
가 曰
陳元龍
은 淮海之士
니 豪氣不除
注+④ 謝承後漢書曰 “陳登, 字元龍, 下邳淮浦人. 學通古今, 處身循禮, 非法不行, 性兼文武, 有雄姿異略. 領廣陵太守.”라하니
昔에 遭亂하여 過下邳라가 見元龍한대 無客主之意하여 不相與語하며 自上大牀臥하고 使客臥下牀이라하니
君有國士之名이라 今四海橫流하고 帝王失所이어늘 而無救世之意하고 求田問舍하여 言無可採하니 是는 元龍所諱也라 何緣當與君語리오 如我면 自臥百尺樓上하고 臥君於地下하리니 何但上下牀之間哉리오하다
3-10【
보補】
허사許汜가
注+① 에 말하였다. “허사許汜는 양려楊慮와 같은 마을 사람이다. 젊을 때에 양려를 스승으로 삼았고, 위魏 무제武帝(조조曹操)의 종사중랑從事中郞이 되었다. 옛날 유표劉表가 마련한 자리에서 진원룡陳元龍을 논평했던 이가 이 사람이다.” 유현덕劉玄德(
유비劉備)과 함께
注+② ≪속한서續漢書≫에 말하였다. “유비劉備는 자字가 현덕玄德이고 탁군涿郡 사람으로 한漢 경제景帝의 아들인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이다.” 유형주劉荊州(
유표劉表)가 마련한 자리에서
注+③ ≪영웅기英雄記≫에 말하였다. “유표劉表는 자字가 경승景升이고 산양山陽 고평高平 사람으로 노공왕魯恭王(유여劉餘)의 후손이다. 형주목荊州牧을 지냈다. 신장身長이 8척尺이고 자태와 용모가 온화하고 아름다웠으며, 장검張儉 등과 함께 ‘’라고 불렸다.” 인물人物에 대하여 같이 논하였다. 허사가 말했다.
“
진원룡陳元龍(
진등陳登)은
인데 거만한 기색을 없애지 못했습니다.”
注+④ 사승謝承의 ≪후한서後漢書≫에 말하였다. “진등陳登은 자字가 원용元龍이고 하비下邳 회포淮浦 사람이다. 학문은 고금古今에 통달했고, 처신處身은 예禮를 따랐고, 법法이 아니면 행行하지 않았으며, 성품은 문무文武를 겸비했고, 영웅의 자태와 뛰어난 책략이 있었다. 영광릉태수領廣陵太守를 지냈다.”
“
허군許君은 〈진원룡이〉 거만하다고 말하는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유비劉備
“예전에 난리를 만나 하비下邳를 지나다가 진원룡을 만났는데, 손님을 대접할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을 걸지도 않았으며 자신은 큰 침상에 올라가 눕고 손님은 아래쪽 침상에 눕도록 하였습니다.”
“그대에게는 국사國士라는 명성이 있습니다. 지금 사해四海는 어지럽고 제왕帝王은 몸 둘 곳이 없는데도, 세상을 구하려는 뜻은 없이 밭을 구하고 집을 물어보기나 하여 취할 만한 말이 없으니, 이는 진원룡이 기피하는 바입니다. 무슨 연유로 그대와 말을 하겠습니까. 나였다면 자신은 백 척의 높은 누각에 눕고 그대는 땅바닥에 눕게 했을 것입니다. 어찌 다만 위아래 침상의 차이만 두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