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德林父校書亡하니 時正嚴冬이어늘 單衰徒跣으로 自駕靈輿反葬하다 博陵豪族崔諶者가 休假還鄉하여 將赴弔德林할새 從者數十騎나 稍稍減留하여 比至德林門하여는 纔餘五騎하고 云
不得令李生怪人熏灼
注+① 隋書曰 “李德林, 字公輔, 博陵安平人. 父敬族, 太學博士. 德林幼聰敏, 數歲誦左思蜀都賦, 十日便度, 十五誦五經古今文, 日數千言. 該博墳典, 陰陽, 無不通涉. 善屬文, 詞覈而理暢. 隋文帝時, 爲相府屬, 加儀同大將軍.”이라하다
2-17【
보補】
이덕림李德林의 부친
(
이경족李敬族)가 죽었다. 때는 바로 엄동설한이었는데 〈이덕림은〉 홑겹의 상복에 맨발로 자신이 직접 상여를 말에 실어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 지냈다.
박릉博陵의 호족
최심崔諶이라는 자가 휴가차 고향에 돌아왔다가 이덕림에게 조문하러 가려 할 때 따르는 자가 수십
기騎였는데 차츰차츰 수를 줄여 이덕림 집 문에 이를 즈음에는 겨우 5기만 남게 하고는 최심이 말하였다.
“
이생李生(이덕림)으로 하여금 남의 휘황찬란한 기세에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
注+① ≪수서隋書≫ 〈이덕림전李德林傳〉에 말하였다. “이덕림李德林은 자字가 공보公輔이고, 박릉博陵 안평安平 사람이다. 부친 이경족李敬族은 태학박사太學博士였다. 이덕림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서너 살 때 좌사左思의 〈촉도부蜀都賦〉를 암송하여 10일 만에 끝냈으며 15세에 오경五經의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을 날마다 수천 구절씩 암송했다. 고대의 전적典籍에 해박하고 음양술陰陽術과 예언서[위서緯書] 등에 모두 통달하였다. 문장을 잘 지어 글이 분명하고 논리가 정연하였다. 수隋 문제文帝 때 상부相府의 속관이 되었으며 의동대장군儀同大將軍이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