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세설신어보(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嚴子陵注+① 范曄後漢書曰 “嚴光, 字子陵, 會稽餘姚人. 少有高名, 與光武同遊學. 及光武即位, 變姓名隱身不見. 帝令以物色訪之, 齊國上言‘有一男子, 披羊裘, 釣澤中.’ 帝疑是光, 安車聘之, 三反而後至, 終不能屈.” 與侯司徒書曰
君房足下 位至鼎足하니 甚善이라 懐仁輔義 天下悅하고 阿諛順旨 腰領絶하리라
侯得書하여 封奏之하니 帝笑曰
此狂奴故態注+② 皇甫謐高士傅曰 “霸與光素舊. 使西曺屬侯子道奉書, 光不起, 於牀上箕踞抱膝, 發書讀訖, 問子道曰 ‘君房素癡, 今爲三公, 寧小差否?’ 子道曰 ‘位已鼎足, 不癡也.’ 光曰 ‘遣卿來何言?’ 子道傳霸言, 光曰 ‘卿言不癡, 是非癡語也. 天子徵我三, 乃来. 人主尙不見, 當見人臣乎?’ 子道求報, 光曰 ‘我手不能書.’ 乃口授之. 使者嫌少, 可更足. 光曰 ‘買菜乎? 求益也.’”로다하다


19-1 【엄자릉嚴子陵(엄광嚴光)이注+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에 말했다. “엄광嚴光자릉子陵으로 회계會稽 여요餘姚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이름이 높았으며 광무제光武帝(유수劉秀)와 같이 유학遊學하였다. 광무제가 즉위하자 〈엄광은〉 성명姓名을 바꾸고 몸을 감추고서 나타나지 않았다. 광무제가 그를 물색하여 찾도록 하였는데 나라에서 ‘어떤 남자가 있는데 양가죽 옷을 걸치고 못에서 낚시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상언하였다. 광무제는 엄광인 듯 생각이 들어 안거安車를 보내 불렀는데 〈안거가〉 세 번 왕복하고서야 〈엄광이〉 왔지만 끝내 〈그의 뜻을〉 굽히게 하지 못했다.” 후사도侯司徒(후패侯霸)에게 서신을 보냈다.
엄자릉嚴子陵(엄광嚴光)엄자릉嚴子陵(엄광嚴光)
군방君房 족하足下께서 지위가 삼공三公에 이르렀으니 아주 잘되었습니다. 을 품고 를 보필하면 천하天下가 기뻐할 것이요, 아첨하고 〈황제의〉 뜻에 순종한다면 허리와 목이 끊어질 것입니다.”
후사도가 서신을 받고 서찰을 봉해 〈황제에게〉 상주하니,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이 미치광이는 예전의 태도 그대로구나.”注+황보밀皇甫謐의 ≪고사부高士傅≫에 말했다. “후패侯霸는 엄광과 평소 친분이 있었다. 후자도侯子道를 시켜 서신을 올렸는데, 엄광은 일어나지 않고 침상 위에서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가 무릎을 감싸안은 채 서신을 꺼내 다 읽고는 후자도에게 ‘후군방侯君房은 평소 멍청했었는데 지금은 삼공三公이 되었으니 조금 나아졌는가?’라고 하였다. 후자도가 ‘지위가 이미 삼공이니 멍청하지 않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엄광이 ‘그대를 보내면서 무슨 말을 했는가?’라고 하니 후자도가 후패의 말을 전했다. 엄광이 ‘그대는 〈그가〉 멍청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대가 전한 그의〉 이 말은 멍청한 말이 아닌가? 천자天子께서 나를 세 번 부르시고서야 내가 왔다. 군주조차 뵙지 않았는데 신하된 사람을 보겠는가?’ 후자도가 답장을 청하자, 엄광이 ‘나는 손으로 글씨를 쓰지 못한다.’라고 하고는 입으로 불러주었다. 심부름하는 자가 내용이 적다고 꺼리며 더 보태달라고 하자, 엄광이 ‘채소를 사는가? 더 달라고 하게!’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西曹屬 : 西曹는 벼슬 이름이다. 漢나라 때 丞相과 太尉의 属吏는 曹를 나누어 일을 처리했는데 西曹가 있었다. 책임자는 掾으로, 부관은 ‘屬’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百官의 奏事를 담당했다가 나중에는 府 내부 관리들의 임용을 주로 했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