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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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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羨之 沈密寡言하여 不以憂喜見色하며 頗工奕棊로되 觀戱 常若未解注+① 宋書曰 “徐羨之, 字宗文, 東海郯人. 祖寧, 吏部尙書郞, 父祚之, 上虞令. 羨之歷官司空․錄尙書事. 羨之起自布衣, 又無學術, 直以志力局度, 一旦居廊廟, 朝野推服, 謂有宰臣之望. 與謝晦․傅亮同誅.” 嘗與謝晦 傳亮注+② 宋書曰 “傅亮, 字季友, 北地人. 博涉經史, 尤善文辭, 官散騎常侍.”으로 宴聚한대 晦亮 才學辯博이나 羨之 風度詳整하여 時然後言이라 鄭鮮之 歎曰
觀徐傅言論하니 不復以學問爲長注+③ 沈約宋書曰 “鄭鮮之, 字道子, 滎陽開封人. 高祖渾, 魏將作大匠, 曾祖襲, 大司農, 父遵, 尙書郞. 襲初爲江乘令, 因居縣境, 鮮之下帷讀書, 絶交遊之務. 初爲桓偉輔國主簿, 歷官尙書右僕射.”이라하다


13-21 【서선지徐羨之는 침착하고 근엄하며 과묵하여 근심과 기쁨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고, 바둑을 제법 잘 두었는데도 〈남이 두는〉 바둑을 구경할 때는 항상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였다.注+① ≪송서宋書≫ 〈서선지렬전徐羨之列傳〉에 말하였다. “서선지는 종문宗文으로, 동해東海 사람이다. 조부 서녕徐寧이부상서랑吏部尙書郞을, 부친 서조지徐祚之상우현령上虞縣令을 역임하였다. 서선지는 사공司空녹상서사錄尙書事를 역임하였다. 서선지는 포의布衣(평민)로서 〈관직에〉 기용된 데다가 또 학술도 없었지만, 단지 지혜와 재능만으로 하루아침에 조정에서 벼슬하니, 조정과 재야에서 추앙하고 심복心服하여 재상의 명망을 지녔다고 하였다. 한번은 사회謝晦전량傳亮注+② ≪송서宋書≫ 〈부량열전傅亮列傳〉에 말하였다. “부량은 계우季友로, 북지北地 사람이다. 경서와 역사서를 널리 섭렵하고 특히 문장에 뛰어났고,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역임하였다.” 더불어 술자리에 모였는데, 사회와 부량은 말재주가 뛰어나고 학식이 풍부했으나, 서선지는 언행이 차분하고 태도가 엄정하여 〈말할〉 때가 된 뒤에야 말하였다. 정선지鄭鮮之가 감탄하면서 말하였다.
“서선지와 부량의 담론을 살펴보니, 더 이상 학문만을 장점으로 삼으면 안 되겠다.”注+심약沈約의 ≪송서宋書≫에 말하였다. “정선지鄭鮮之도자道子로, 형양滎陽 개봉開封 사람이다. 고조부 정혼鄭渾(삼국三國)나라의 장작대장將作大匠을, 증조부 정습鄭襲대사농大司農을, 부친 정준鄭遵상서랑尙書郞을 역임하였다. 정습이 처음에 강승현령江乘縣令이 되었기 때문에 강승현의 경내에 거주했는데, 〈그곳에 있던〉 정선지는 문을 닫아걸고 독서만 하고 교유를 끊었다. 처음에 보국장군輔國將軍 주부主簿가 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가 되었다.”


역주
역주1 謝晦․傅亮과 함께 주살되었다 : 南朝 宋나라 때에 徐羨之와 사회․부량 등이 어린 왕 劉義符를 폐위하여 營陽王으로 격하시키고, 얼마 후 그와 그 동생인 廬陵王 劉義眞을 죽이고, 셋째 劉義隆(文帝)을 옹립하였다. 그러나 2년 후 문제는 유의부와 유의진을 죽인 책임을 물어 이들을 죽였다.(≪魏書≫ 〈島夷劉裕傳〉)
역주2 桓偉 : ?~403. 譙國 龍亢 사람으로, 字는 幼道이며, 大司馬 桓溫의 아들이다. 晉나라 都督荆益寧秦梁五州諸軍事․安西將軍․領南蠻校尉․荆州刺史 등을 역임하고, 西昌縣侯에 봉해졌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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