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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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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汝南 旣除 遂停墓所한대 兄子濟 每來拜墓할새 略不過叔하고 叔亦不候時過에도 止寒溫而已 聊試問近事하니 答對 甚有音辭하고 出濟意外하여 濟極惋愕이라
仍與語 轉造精微하니 濟先略無子姪之敬이라가 旣聞其言하얀 不覺懍然하여 心形俱肅이라 遂留共語하여 彌日累夜 濟雖儁爽이나 自視缺然하니 乃喟然歎曰
家有名士로대 三十年而不知라하다
濟去 叔送至門할새 濟從騎有一馬한대 絶難乗하여 少能騎者 濟聊問叔하되
好騎乗不잇가하니
亦好爾
濟又使騎難乗馬하니 叔姿形旣妙하고 回策如縈하여 名騎 無以過之 濟益歎其難測 非復一事注+① 鄧粲晉紀曰 “王湛, 字處冲, 太原人. 隱德, 人莫之知, 雖兄弟宗族, 亦以爲癡, 唯父昶異焉. 昶喪, 居墓次, 兄子濟往省湛, 見牀頭有周易. 謂湛曰 ‘叔父用此何爲? 頗曾看不?’ 湛笑曰 ‘體 脫復看耳. 今日當與汝言.’ 因共談易, 剖柝入微, 妙言奇趣, 濟所未聞, 歎不能測. 濟性好馬, 而所乘馬駿駛, 意甚愛之. 湛曰 ‘此雖小駛, 然力薄不堪苦. 近見督郵馬, 當勝此, 但養不至耳.’ 濟取督郵馬, 穀食十數日, 與湛試之. 湛未嘗乘馬, 卒然便馳騁, 步驟不異於濟, 而馬不相勝. 湛曰 ‘今直行車路, 何以別馬勝不? 唯當就蟻封耳.’ 於是就蟻封盤馬, 果倒踣. 其儁識天才乃爾.” 旣還 渾問濟하되
何以暫行累日고하니
濟曰
始得一叔이니이다라한대
渾問其故하니 濟具歎述如此 渾曰
何如我오하니
濟曰
濟以上人이니이다라하다
武帝 每見濟 輒以湛으로 調之曰
卿家癡叔死未오하면
濟常無以答하더니 旣而得叔後 武帝又問如前하니 濟曰
臣叔不癡니이다라하고
稱其實美 帝曰
誰比오하니
濟曰
山濤以下 魏舒以上注+② 晉陽秋曰 “濟有人倫鑒識, 其雅俗是非, 少所優潤, 見湛歎服其德宇. 時人謂 ‘湛, 上方山濤不足,下比魏舒有餘.’ 湛聞之曰 ‘欲以我處乎?’” 王隱晉書曰 “魏舒, 字陽元, 任城人. 幼孤, 爲外氏甯家所養. 甯氏起宅, 相者曰 ‘當出貴甥.’ 外祖母意以氏甥小而惠, 謂應相也. 舒曰 ‘當爲外氏成此宅相.’ 少名遲鈍. 叔父衡使守水碓, 每言‘舒堪八百户長, 我願畢矣.’ 舒不以介意. 身長八尺三寸, 不修常人近事. 少工射, 著韋衣, 入山澤, 每獵大獲. 爲後將軍鍾毓長史, 毓與參佐射戱, 舒常爲坐畫籌. 後值朋人少, 以舒充數, 於是發無不中. 加閑雅, 殆盡其妙. 毓歎謝之曰 ‘吾之不足盡卿, 如此射矣.’ 轉相國參軍, 晉王每朝罷, 目送之曰 ‘魏舒堂堂, 人之領袖.’ 累遷侍中ㆍ司徒.”이니이다라하다
於是 顯名하여 年二十八 始宦이라
【頭註】
王云 “不言如父, 而言勝己, 居然有王子敬意. 然濟寔有勝父處.”


15-21 왕여남王汝南(왕담王湛)이 부모의 복제服制를 마친 뒤에 그대로 묘소에 머물렀는데, 형의 아들 왕제王濟가 와서 성묘할 때마다 거의 숙부에게 들르지 않았고 숙부(왕담) 또한 인사를 하지 않았다. 왕제가 어쩌다 간혹 들러도 날씨나 말하는 정도였다. 후에 시험삼아 근래의 일에 관하여 물어보니 〈왕담의〉 대답이 매우 조리가 있고 뜻밖이어서 왕제가 매우 놀랐다.
함께 담론을 나누어 점점 정미精微한 경지에 이르게 되자, 왕제가 처음에는 거의 생질甥姪로서의 공경을 표하지 않다가 그의 말을 들은 후에는 자신도 모르게 두려워져서 마음과 몸이 모두 엄숙해졌다. 마침내 그대로 머물러 종일토록 여러 날 동안 함께 대화하였다. 왕제도 걸출한 인재였으나 스스로 자신이 부족하다고 여기고는 마침내 깊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집안에 명사名士가 계셨는데 30년 동안이나 모르고 있었구나.”
왕제가 떠나려 하여 숙부가 전송하여 문에 이르렀을 때, 왕제를 수행하는 기병에게 말 한 마리가 있었는데, 도저히 타기 어려워 그 말을 탈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왕제가 넌지시 숙부에게 물었다.
“말 타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왕담王湛왕담王湛
그러자 〈왕담이〉 대답하였다.
“그것도 좋아하지.”
왕제가 또 타기 어려운 말을 타게 하였는데, 숙부의 자세가 절묘하고 채찍을 돌리는 것이 마치 휘감는 것 같아 이름난 기병도 그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왕제는 그의 예측하기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에注+등찬鄧粲의 ≪진기晉紀≫ 〈왕담전王湛傳〉에 말하였다. “왕담王湛처충處冲이고, 태원太原 사람이다. 을 숨겨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해 형제나 친척이라 하더라도 그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였으나 부친인 왕창王昶만은 그를 남다르게 여겼다. 왕창이 죽자 묘소에서 지낼 때 형의 아들 왕제王濟가 가서 문안하다가, 침상 머리맡에 ≪주역≫이 있는 것을 보았다. 왕담에게 말하기를, ‘숙부는 이것으로 무엇을 하십니까? 좀 보기는 하십니까?’ 하니, 왕담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몸이 좋을 때 간혹 다시 볼 뿐이다. 오늘은 너와 이야기해 보아야겠다.’ 하고는 함께 ≪주역≫에 대해 담론을 나누었는데, 정밀하게 분석하고 절묘한 말과 기이한 취향이 왕제가 들어보지 못한 것이어서 그 헤아릴 수 없음에 감탄하였다. 왕제는 품성이 말을 좋아하였는데, 그가 타는 말은 준마駿馬여서 내심 그 말을 몹시 아꼈다. 왕담이 말하기를, ‘이 말은 조금 뛰어나기는 하지만 힘이 부족하여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다. 근래 독우督郵의 말을 보니 이것보다 나을 것 같다. 다만 제대로 돌보지 않았을 뿐이다.’ 하였다. 왕제가 독우의 말을 취하여 십수 일동안 먹인 뒤 왕담과 함께 그 말을 시험하였다. 왕담은 말을 타 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바로 내달렸고, 걷고 달리는 것이 왕제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말이 나은 지 승부가 나지 않자, 왕담이 말하기를, ‘이번에는 똑바른 평탄한 길을 다녔으니 어떻게 어느 말이 나은지 구별하겠느냐? 언덕에 나가야 알 수 있다.’ 하였다. 이리하여 언덕에 가서 말을 시험해보니 〈왕제의〉 말이 쓰러졌다. 그의 탁월한 감식과 천재적인 능력이 이와 같았다.” 감탄하였다. 돌아온 뒤에 〈부친인〉 왕혼王渾이 왕제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잠깐 갔다가 여러 날을 머물렀느냐?”
왕제가 말하였다.
“처음으로 숙부 한 분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왕혼이 그 까닭을 묻자 왕제가 감탄하며 모두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왕혼이 말하였다.
“우리와 비교하면 어떠하냐?”
왕제가 말하였다.
“저보다 나은 분입니다.”
무제武帝(사마염司馬炎)는 왕제를 만날 때마다 번번이 왕담을 소재로 삼아 조롱하곤 하였다.
“경 집안의 바보 숙부는 아직 죽지 않았는가?”
그때마다 왕제는 대답하지 않았었다. 숙부를 〈제대로〉 알게 된 얼마 뒤에 무제가 또 전처럼 묻자, 왕제가 말하였다.
“신의 숙부는 바보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의 실제 장점을 칭찬하였다. 무제가 말하였다.
“누구에게 견줄 수 있겠는가?”
왕제가 말하였다.
산도山濤 이하이고 위서魏舒 이상입니다.”注+② ≪진양추晉陽秋≫에 말하였다. “왕제王濟는 인재에 대한 감식안을 지녔는데, 그들의 고상함과 속됨, 옳고 그름에 대해 후하게 평가한 적이 없었으나 왕담王湛을 만나 보고는 그의 기량에 탄복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왕담은 위로 산도山濤에 견주기에는 부족하고 아래로 위서魏舒에 견주기에는 넉넉하다.’ 하였다. 왕담이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나를 계씨季氏맹씨孟氏 사이에 두려 하는가?’ 하였다.”
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 말하였다. “위서魏舒양원陽元이고, 임성任城 사람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외가인 영씨甯氏에게 양육되었다. 영씨가 집을 지을 때 지관이 ‘귀한 외손자가 나올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외조모는 위씨魏氏인 외손자가 어리지만 총명하여 지관의 말대로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위서가 말하기를, ‘외가를 위해 이 지관의 말을 이루어 주겠다.’ 하였다. 어렸을 때는 느리고 둔한 것으로 이름났다. 숙부 위형魏衡이 그에게 물레방아를 지키게 하였을 때, 매번 말하기를 ‘위서가 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라고 하였는데 위서는 개의치 않았다. 신장이 8자 3치였고 보통 사람이 하는 평범한 일은 하지 않았다. 젊어서 활쏘기를 잘하여 가죽옷을 입고 산택山澤에 들어가 사냥을 할 때마다 〈짐승을〉 많이 잡았다. 후장군後將軍 종육鍾毓장사長史가 되었는데, 종육이 부하들과 활쏘기를 하며 놀 때 위서는 늘 앉아서 맞힌 화살을 계산하였다. 나중에 활쏘기의 짝이 모자라자 위서를 채워 넣었다. 이에 위서가 쏘기만 하면 모두 맞추었고, 게다가 박사博射할 때의 자세가 품위가 있어 거의 그 묘기를 다 발휘하였다. 종육이 탄복하며 사과하기를, ‘내가 경의 재주를 다 발휘하지 못하게 하였구나. 이처럼 활을 잘 쏘는데.’라고 하였다. 상국참군相國參軍으로 옮겼는데, 진왕晉王(사마소司馬昭)이 매번 조회가 끝나고 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위서는 당당하구나. 사람들의 로다.’ 하였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시중侍中사도司徒가 되었다.”
이리하여 〈왕담의〉 명성이 드러나 28세에 비로소 벼슬하였다.
두주頭註
왕세무王世懋:부친과 같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보다 낫다고 말하였으니, 분명히 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왕제王濟는 참으로 부친보다 나은 점이 있다.


역주
역주1 800戶의 長 : 작은 고을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역주2 領袖 : 領은 옷깃이고 袖는 소매인데, 사람들의 典範, 儀則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역주3 所生 : 父母를 말한다.
역주4 : ‘或然’의 의미이다.(≪世說音釋≫)
역주5 佳時 : ≪晉書≫ 〈王湛傳〉과 安永本에는 ‘不佳時’로 되어있다.
역주6 季孟之間 : 계씨와 맹씨의 중간이라는 것은 상등과 하등의 중간이라는 말과 같다. ≪논어≫ 〈微子〉에 齊나라 景公이 孔子에 대해, ‘季氏와 같이 대우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없겠지만 계씨와 孟氏의 중간 정도로는 대우하겠다.’ 하였다. 당시 魯나라에 季孫氏ㆍ叔孫氏ㆍ孟孫氏 三卿이 있었는데, 계씨는 上卿이고 맹씨는 下卿이었다.
역주7 (盛)[魏] : 저본에는 ‘盛’으로 되어 있으나, ≪晉書≫ 〈魏舒傳〉에 의거하여 ‘魏’로 바로잡았다.
역주8 博措 : 博射할 때의 자세를 말한다. 博射는 당시 江南에서 성행하던 일종의 도박 성격의 활쏘기로, 약한 활에 긴 화살을 표적에 쏘고 손을 모아 인사하고 양보를 하며 〈射臺를〉 오르내리면서 예를 행하였다.(≪顏氏家訓≫ 〈雜藝〉)
역주9 王子敬(王獻之)과 같은 뜻 : 왕헌지는 부친인 王羲之와 함께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하였다. 謝安이 왕헌지에게 부친과 비교하여 누가 더 글씨가 훌륭한지 묻자, 왕헌지가 ‘우열을 가릴 수 없다.[莫能判]’는 뜻으로 대답한 일이 있다. 여기서 王濟가 다만 자신보다 낫다고 말한 것은 부친인 王渾과 숙부인 王湛의 능력은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본 것이다. 본서 〈品藻〉 63 참고.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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