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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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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侯玄 旣被桎梏注+① 魏氏春秋曰 “玄, 字太初, 譙國人, 夏侯尙之子, 大將軍前妻兄也. 風格高朗, 弘辯博暢. 正始中, 護軍. 曹爽誅, 徵爲太常, 內知不免, 不交人事, 不畜筆硏. 及太傅薨, 許允謂玄曰 ‘子無復憂矣.’ 玄歎曰 ‘士宗, 卿何不見事乎? 此人猶能以通家年少遇我, 子元․子上不吾容也.’ 後中書令李豐, 惡大將軍執政, 遂謀以玄代之, 大將軍聞其謀, 誅豐, 收玄送廷尉.” 干寶晉紀曰 “初, 豐之謀也, 使告玄, 玄答曰 ‘宜詳之爾.’ 不以聞也, 故及於難.”한대 鍾毓爲廷尉注+② 魏書曰 “毓, 字穉叔, 頴川長社人, 繇長子也. 年十四, 爲散騎侍郞. 機捷談笑, 有父風. 仕至車騎將軍.” 鍾會 先不與玄相知어늘 因便狎之 玄曰
雖復刑餘之人이나 未敢聞命注+③ 世語曰 “玄至廷尉, 不肯下辭. 廷尉鍾毓, 自臨玄, 玄正色曰 ‘吾當何辭? 爲令史責人耶? 卿便爲吾作.’ 毓以玄名士, 節高不可屈, 而獄當竟, 夜爲作辭, 令與事相附, 流涕以示玄, 玄視之曰 ‘不當若是耶.’ 鍾會, 年少於玄, 玄不與交, 是日於毓坐狎玄, 玄正色曰 ‘鍾君何得如是?’” 名士傳曰 “初玄以鍾毓志趣不同, 不與之交. 玄被收時, 毓爲廷尉, 執玄手曰 ‘太初何至於此?’ 玄正色曰 ‘雖復刑餘之人, 不可得交.’” 按郭頒, 西晉人, 時世相近, 爲晉魏世語, 事多詳覈. 孫盛之徒, 皆采以著書, 竝云玄距鍾會, 而袁宏名士傳最後出, 不依前史, 以爲鍾毓, 可謂謬矣.이라하다
考掠 初無一言하고 臨刑東市 顔色不異注+④ 魏志曰 “玄, 格量弘濟, 臨斬, 顔色不異, 擧止自若.”하다
【頭註】
劉云 “其狎之, 未必以故, 非內交也.”


10-9 하후현夏侯玄이 이미 체포되었는데,注+에 말하였다. “하후현夏侯玄태초太初로, 초국譙國 사람이며, 의 아들이자 대장군大將軍(조상曹爽)의 의 오라비이다. 〈그는〉 풍격이 고상하고 언변이 유창하였다. 〈(삼국三國) 제왕齊王정시正始 연간(240~248)에 호군護軍이 되었다. 이 죽임을 당한 뒤에 〈조정에서〉 초빙하여 태상太常이 되었는데,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고 기록도 모아두지 않았다. 태부太傅(사마의司馬懿)가 세상을 떠나자, 이 하후현에게 ‘그대에게 더 이상 근심거리가 없습니다.’ 하니, 하후현이 탄식하면서 ‘사종士宗(허윤)이여, 그대는 어찌 사태를 〈제대로〉 보지 못합니까? 이 사람(사마의)은 오히려 〈나를〉 대대로 교유해온 집안의 연소자로서 대우해주었으나, 자원子元(사마사司馬師)과 자상子上(사마소司馬昭)은 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이후에 중서령中書令 은 대장군(사마사)이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싫어하여 마침내 모의하여 하후현으로 그를 대체하려 했는데, 대장군이 그 모의를 듣고는 이풍을 주살하고, 하후현을 체포하여 정위廷尉에게 압송하였다.”
에 말하였다. “처음 이풍이 모의할 때 사람을 보내 〈구체적인 계획을〉 하후현에게 알려주니, 하후현이 ‘마땅히 더 자세하게 알아야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하후현은〉 이풍의 모의를 〈사마사에게〉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난禍難에 이르렀다.”
당시에 종육鍾毓정위廷尉의 신분이었다.注+②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종육전鍾毓傳〉에 말하였다. “종육은 치숙穉叔으로, 영천潁川 장사長社 사람이며, 의 맏아들이다. 14세에 산기시랑散騎侍郞이 되었다. 영민하고 담소하는 모습에 부친의 풍모가 있었다. 벼슬이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이르렀다.” 〈종육의 아우〉 는 이전에 하후현과 아는 사이가 아니었는데, 〈하후현에게 오랜 벗인 듯이〉 망설임 없이 친압親狎하였다. 하후현이 말하였다.
종회鍾會종회鍾會
“〈내가〉 비록 형벌을 받는 사람이지만, 감히 〈그대의〉 말을 듣지 못하겠소.”注+에 말하였다. “하후현夏侯玄정위廷尉의 〈관서에〉 도착했는데, 조금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정위 종육鍾毓이 직접 나서서 하후현을 심문하자, 하후현이 정색하면서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오? 〈구경九卿의 반열에 있는 그대가 지금은〉 영사令史(문서 담당 관리)가 되어 나를 심문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그대가 즉시 나를 위해 〈공초供招를〉 작성하시오.’ 하였다. 종육은 하후현이 명사名士이기 때문에 그의 높은 절개를 꺾을 수 없다고 여겼으나, 옥사獄事는 끝내야 했기에 밤에 그를 위해 공초를 작성하되 〈조사한〉 일과 부합하도록 맞추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하후현에게 보여주었더니, 하후현이 이를 보고는 ‘이처럼 타당하지 않단 말인가.’ 하였다. 종회鍾會는 하후현보다 나이가 어려서 하후현이 그와 교유하지 않았는데, 이날 종육이 〈하후현을 심문하는〉 자리에서 하후현에게 〈오랜 벗인 듯이〉 친압하니, 하후현이 정색하면서 ‘종군鍾君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에 말하였다. “처음에 하후현은 종육이 〈자신과는〉 뜻과 지향이 다르다고 여겨 그와 교유하지 않았다. 하후현이 체포되었을 때 종육이 정위廷尉의 신분이었는데, 하후현의 손을 잡으면서 ‘태초太初(하후현)가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소?’ 하자, 하후현이 정색하면서 ‘비록 형벌을 받는 사람이지만, 〈그대와〉 교유할 수는 없소.’ 하였다.”
생각건대, 곽반은 서진西晉시대 사람이니 〈하후현의 생존 시기와〉 시대가 가까워 〈그가〉 저술한 ≪진위세어晉魏世語(위진세어)≫는 기사가 대부분 자세하고 정확하다. 손성孫盛 같은 사람들은 모두 〈이 책의 내용을〉 채록하여 책을 저술했는데, 모두 “하후현이 종회〈와의 교유〉를 거부했다.”고 하였는데, 원굉의 ≪정시명사전≫은 가장 뒤에 출현했는데도 이전의 역사에 의거하지 않고 〈하후현이 교제를 거부한 대상이〉 종육이라고 하였으니, 오류라고 할 만 하다.
고문을 해도 〈하후현은〉 처음부터 한 마디 말을 하지 않았고, 에서 처형당할 때에도 안색이 변치 않았다.注+④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하후현전夏侯玄傳〉에 말하였다. “하후현은 품격과 기량이 넓고 컸다. 참수를 당할 때에도 안색이 변치 않고 행동거지가 태연자약했다.”
두주頭註
유진옹劉辰翁종회鍾會하후현夏侯玄에게 친압親狎한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없으니, 교제를 맺으려고 한 것이 아니다.


역주
역주1 孫盛의 ≪魏氏春秋≫ : 손성(302~373)은 太原 中都 사람으로, 字가 安國이다. 東晉시대 征西大將軍 桓溫 막하에서 參軍이 되었는데, 환온이 제3차 북벌에서 前燕을 공격할 때 枋頭에서 패전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진양추≫에 기록하였다. ≪魏氏春秋≫는 魏(三國)나라의 역사를 기술한 史書이다.
역주2 夏侯尙 : ?~226. 沛國 譙郡 사람으로, 魏(三國)나라의 名將이다. 字는 伯仁이며, 征西將軍 夏侯淵의 조카이다.
역주3 前妻 : 景懷夏侯皇后로, 이름은 徽, 字는 媛容이다.
역주4 曹爽 : ?~249. 沛國 譙縣 사람으로, 字는 昭伯이며, 魏(三國)나라 大司馬 曹眞의 맏아들이다. 明帝(曹叡)가 양자 曹芳을 후계자로 지명하며 조상에게 후사를 부탁하자, 조상은 나이 어린 조방을 보좌하며 정권을 잡았으나 司馬懿가 정변을 일으켰을 때 멸족 당했다.
역주5 마음속으로……알고는 : 夏侯玄은 자신이 曹爽과 고종사촌 관계이기 때문에 조상의 죄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할 것을 알았다는 뜻이다.
역주6 許允 : ?~254. 高陽 사람으로, 字는 士宗이다. 魏(三國)나라 中領軍을 역임하였고, 李豐․夏侯玄과 사이가 좋았다.
역주7 李豐 : ?~254. 馮翊 東縣 사람으로, 字는 安國 또는 宣國이며, 魏(三國)나라 中書令을 역임하였다. 才性四本論에서 才性異의 입장으로, 재주와 본성은 각각 별개로, 본성은 근본적인 것이고 재주는 부차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코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역주8 干寶의 ≪晉紀≫ : 282?~351? 新蔡 사람으로, 字는 令升이다. 晉 元帝 때에 著作郞이 되어 칙명을 받아 國史 편찬의 책임을 맡았다. 이후에 司徒의 右長史가 되었다가 散騎常侍로 승진하였다. ≪진기≫는 20권으로, 사실을 정직하게 기술하면서도 완곡하여 당시에 良史라고 칭송되었고, 후대의 사학가들의 존중을 받았다.
역주9 鍾繇 : 151~230. 穎川 사람으로, 字는 元常이며, 시호는 成이다. 漢나라 말기에 孝濂으로 천거되어 벼슬했으며, 魏(三國)나라에서 太傅를 역임했으며, 隷書․楷書․行書에 뛰어났다.
역주10 鍾會 : 225~264. 魏(三國)나라 장군으로, 자는 士季이다. 박학다식하여 젊은 나이에 승진을 거듭하고 關內侯의 직위에 올랐으며, 晉 武帝 司馬炎의 아버지인 司馬昭로부터 張子房으로 불렸다. 그러나 蜀漢을 정벌한 뒤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내부에서 불화가 일어나 胡烈 등 부하 장수들에게 피살되었다.
역주11 郭頒의 ≪魏晉世語≫ : 곽반(?~?)은 西晉시대 사학가로, 字는 長公으로, 처음에 令史가 되었고, 이후에 지방으로 나가 襄陽縣令이 되었다. ≪위진세어≫는 魏晉시대 명사들에 대한 일화를 기록했는데, ≪三国志≫의 裴松之의 注에 여러 차례 인용하였고, 全書는 일실되었다.
역주12 下辭 : 供詞로, 심문을 받는 자가 구두나 서면으로 자신의 죄를 진술하거나, 또는 그 진술한 내용이다.
역주13 袁宏의 ≪正始名士傳≫ : 원굉(328~376)은 東晉시대 문학가․사학가이다. 陳郡 陽夏縣 사람으로, 字가 彥伯이고, 어릴 때 이름이 虎이다. ≪정시명사전≫은 魏晉시대 명사들에 대한 일화를 기록했는데, 全書는 일실되었고, ≪世說新語≫의 주석, ≪水經注≫, ≪文選≫의 주석 등에 佚文 20여 則이 남아 있다.
역주14 東市 : 漢나라 때에 수도 長安의 동쪽 저잣거리로, 사형을 집행했던 곳인데, 刑場을 가리킨다.
역주15 : ‘理’로 읽어야 하니 ‘治’의 뜻이다.(≪世說音釋≫)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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