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하후현에게 ‘그대에게 더 이상 근심거리가 없습니다.’ 하니, 하후현이 탄식하면서 ‘사종士宗(허윤)이여, 그대는 어찌 사태를 〈제대로〉 보지 못합니까? 이 사람(사마의)은 오히려 〈나를〉 대대로 교유해온 집안의 연소자로서 대우해주었으나, 자원子元(사마사司馬師)과 자상子上(사마소司馬昭)은 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이후에 중서령中書令
에 말하였다. “처음 이풍이 모의할 때 사람을 보내 〈구체적인 계획을〉 하후현에게 알려주니, 하후현이 ‘마땅히 더 자세하게 알아야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하후현은〉 이풍의 모의를 〈사마사에게〉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난禍難에 이르렀다.” 당시에 종육鍾毓이 정위廷尉의 신분이었다.注+②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종육전鍾毓傳〉에 말하였다. “종육은 자字가 치숙穉叔으로, 영천潁川장사長社 사람이며,
하려고 하지 않았다. 정위 종육鍾毓이 직접 나서서 하후현을 심문하자, 하후현이 정색하면서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오? 〈구경九卿의 반열에 있는 그대가 지금은〉 영사令史(문서 담당 관리)가 되어 나를 심문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그대가 즉시 나를 위해 〈공초供招를〉 작성하시오.’ 하였다. 종육은 하후현이 명사名士이기 때문에 그의 높은 절개를 꺾을 수 없다고 여겼으나, 옥사獄事는 끝내야 했기에 밤에 그를 위해 공초를 작성하되 〈조사한〉 일과 부합하도록 맞추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하후현에게 보여주었더니, 하후현이 이를 보고는 ‘이처럼 타당하지 않단 말인가.’ 하였다. 종회鍾會는 하후현보다 나이가 어려서 하후현이 그와 교유하지 않았는데, 이날 종육이 〈하후현을 심문하는〉 자리에서 하후현에게 〈오랜 벗인 듯이〉 친압하니, 하후현이 정색하면서 ‘종군鍾君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에 말하였다. “처음에 하후현은 종육이 〈자신과는〉 뜻과 지향이 다르다고 여겨 그와 교유하지 않았다. 하후현이 체포되었을 때 종육이 정위廷尉의 신분이었는데, 하후현의 손을 잡으면서 ‘태초太初(하후현)가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소?’ 하자, 하후현이 정색하면서 ‘비록 형벌을 받는 사람이지만, 〈그대와〉 교유할 수는 없소.’ 하였다.” 생각건대, 곽반은 서진西晉시대 사람이니 〈하후현의 생존 시기와〉 시대가 가까워 〈그가〉 저술한 ≪진위세어晉魏世語(위진세어)≫는 기사가 대부분 자세하고 정확하다. 손성孫盛 같은 사람들은 모두 〈이 책의 내용을〉 채록하여 책을 저술했는데, 모두 “하후현이 종회〈와의 교유〉를 거부했다.”고 하였는데, 원굉의 ≪정시명사전≫은 가장 뒤에 출현했는데도 이전의 역사에 의거하지 않고 〈하후현이 교제를 거부한 대상이〉 종육이라고 하였으니, 오류라고 할 만 하다.
에서 처형당할 때에도 안색이 변치 않았다.注+④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하후현전夏侯玄傳〉에 말하였다. “하후현은 품격과 기량이 넓고 컸다. 참수를 당할 때에도 안색이 변치 않고 행동거지가 태연자약했다.”
注
【두주頭註】
◦ 유진옹劉辰翁:종회鍾會가 하후현夏侯玄에게 친압親狎한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없으니, 교제를 맺으려고 한 것이 아니다.
역주
역주1孫盛의 ≪魏氏春秋≫ :
손성(302~373)은 太原 中都 사람으로, 字가 安國이다. 東晉시대 征西大將軍 桓溫 막하에서 參軍이 되었는데, 환온이 제3차 북벌에서 前燕을 공격할 때 枋頭에서 패전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진양추≫에 기록하였다. ≪魏氏春秋≫는 魏(三國)나라의 역사를 기술한 史書이다.
역주7李豐 :
?~254. 馮翊 東縣 사람으로, 字는 安國 또는 宣國이며, 魏(三國)나라 中書令을 역임하였다. 才性四本論에서 才性異의 입장으로, 재주와 본성은 각각 별개로, 본성은 근본적인 것이고 재주는 부차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코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역주8干寶의 ≪晉紀≫ :
282?~351? 新蔡 사람으로, 字는 令升이다. 晉 元帝 때에 著作郞이 되어 칙명을 받아 國史 편찬의 책임을 맡았다. 이후에 司徒의 右長史가 되었다가 散騎常侍로 승진하였다. ≪진기≫는 20권으로, 사실을 정직하게 기술하면서도 완곡하여 당시에 良史라고 칭송되었고, 후대의 사학가들의 존중을 받았다.
역주9鍾繇 :
151~230. 穎川 사람으로, 字는 元常이며, 시호는 成이다. 漢나라 말기에 孝濂으로 천거되어 벼슬했으며, 魏(三國)나라에서 太傅를 역임했으며, 隷書․楷書․行書에 뛰어났다.
역주10鍾會 :
225~264. 魏(三國)나라 장군으로, 자는 士季이다. 박학다식하여 젊은 나이에 승진을 거듭하고 關內侯의 직위에 올랐으며, 晉 武帝 司馬炎의 아버지인 司馬昭로부터 張子房으로 불렸다. 그러나 蜀漢을 정벌한 뒤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내부에서 불화가 일어나 胡烈 등 부하 장수들에게 피살되었다.
역주11郭頒의 ≪魏晉世語≫ :
곽반(?~?)은 西晉시대 사학가로, 字는 長公으로, 처음에 令史가 되었고, 이후에 지방으로 나가 襄陽縣令이 되었다. ≪위진세어≫는 魏晉시대 명사들에 대한 일화를 기록했는데, ≪三国志≫의 裴松之의 注에 여러 차례 인용하였고, 全書는 일실되었다.
역주12下辭 :
供詞로, 심문을 받는 자가 구두나 서면으로 자신의 죄를 진술하거나, 또는 그 진술한 내용이다.
역주13袁宏의 ≪正始名士傳≫ :
원굉(328~376)은 東晉시대 문학가․사학가이다. 陳郡 陽夏縣 사람으로, 字가 彥伯이고, 어릴 때 이름이 虎이다. ≪정시명사전≫은 魏晉시대 명사들에 대한 일화를 기록했는데, 全書는 일실되었고, ≪世說新語≫의 주석, ≪水經注≫, ≪文選≫의 주석 등에 佚文 20여 則이 남아 있다.
역주14東市 :
漢나라 때에 수도 長安의 동쪽 저잣거리로, 사형을 집행했던 곳인데, 刑場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