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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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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敦 引軍하여 垂至大桁하니 明帝이라 溫嶠爲丹陽尹한대 帝令斷大桁이나 故未斷이어늘
帝大怒瞋目하니 左右莫不悚懼注+① 按晉陽秋․鄧紀皆云 “敦將至, 嶠燒朱雀橋以阻其兵.” 而云“未斷大桁, 致帝怒.” 大爲譌謬. 一本云“帝自勸嶠入.”, 一本作“噉飲帝怒.”, 此則近也. 召諸公來한대 嶠至不謝하고 但求酒炙 王導須臾至하여 徒跣下地하여 謝曰
하여 遂使溫嶠 不容得謝니이다
於是下謝하니 帝乃釋然이라 諸公 共嘆王機悟名言이라
【頭註】
劉云 “未見橋當斷不當斷, 亦非求酒炙時也.”


21-5 왕돈王敦이 군대를 이끌고 에 거의 도달하자 한명제漢明帝가 친히 으로 나가 주둔하였다. 온교溫嶠단양윤丹陽尹이었는데, 명제가 〈그에게〉 대항大桁을 끊도록 하였지만 그는 일부러 끊지 않았다.
명제가 크게 노하여 눈을 부라리니 좌우의 신하들이 두려워 떨지 않는 이가 없었다.注+① 〈유효표가〉 살피건대, ≪진양추晉陽秋≫ 와 등찬鄧粲의 ≪진기晉紀≫에는 모두 “왕돈이 〈수도에〉 도달하려 하자 온교가 주작교朱雀橋를 불태워 그 군대를 저지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 일화에서〉 “대항大桁을 끊지 않아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라고 한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어떤 본에는 “황제가 친히 온교를 들어오도록 권하였다.”라고도 하고, 어떤 본에는 “〈온교가〉 먹고 마셔서 황제가 노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치에〉 가깝다. 〈명제가〉 여러 들을 소집하여 오게 하자, 온교가 와서는 사죄는 하지 않고 다만 술과 산적만 찾았다. 왕도王導가 얼마 뒤에 도착하여 맨발로 땅에 내려가 사죄하며 말하였다.
천자天子의 위엄이 눈앞에 있어 마침내 온교로 하여금 사죄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였나 봅니다.”
이에 온교가 땅에 내려가 사죄하니 황제의 마음이 그제야 풀렸다. 여러 들이 모두 왕도의 기지機智명언名言에 탄복하였다.
두주頭註
유신옹劉辰翁:다리를 끊어야 했는지 말아야 했는지는 보지 못하였으나, 그래도 술과 산적을 찾을 때는 아니었다.


역주
역주1 大桁 : ‘桁’은 ‘航’과 같으니 浮橋이다. 六朝때 秦淮河를 건너 수도인 建康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부교가 여러 개 있었는데, 朱雀門으로 들어가는 부교가 大航이고, 東府城으로 들어가는 부교가 小航이었다.(≪世說音釋≫)
역주2 中堂 : 南皇堂 또는 中皇堂이라고도 하며, 禁衛軍이 주둔하던 곳이다. 東晉, 南朝时에는 建康城 宣阳门 밖에 중당을 두어 建康에 방비할 일이 생기면 황실의 유력자를 이곳에 보내 주둔하게 하였다.
역주3 自出中堂 : 여기서 ‘出’은 ‘出屯’을 의미한다. ≪晉書≫ 〈明帝纪〉에는 “帝次中堂”이라 하였고, ≪资治通鑑≫東晉 太寧 2년(324)조에는 “帝屯于中堂”이라 하였다.
역주4 天威在顏 : ≪春秋左氏傳≫ 僖公 9년 조에 “천자의 위엄이 나의 얼굴에서 지척도 떨어져 있지 않다.[天威不违颜咫尺]”라는 구절에서 원용한 것이다. 천자를 가까이에서 만난 것을 표현한 말이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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