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伯仁
이 爲吏部尙書
한대 在省內
에 夜疾危急
라 時
에 刁玄亮
이 爲尙書令
하여 營救
에 備親好之至
하니 良久小損
注+① 虞預晉書曰 “刁協, 字玄亮, 勃海饒安人. 少好學, 雖不硏精, 而多所博涉. 中興制度, 皆稟於協, 累遷尙書令, 中宗信重之. 爲王敦所忌, 擧兵討之, 奔至江南, 敗死.”이라 明旦
에 報仲智
注+② 鄧粲晉曰 “周嵩, 字仲智, 顗弟也. 性直果俠, 每以才氣陵物. 顗被害, 王敦使人吊焉, 嵩曰 ‘亡兄, 天下有義人, 爲天下無義人所殺, 復何所吊?’ 敦甚銜之, 猶取爲從事中郞, 因事誅嵩.” 晉陽秋曰 “嵩事佛, 臨刑猶誦經.”하니 仲智
가 狼狽來
하여
始入戶할새 刁가 下牀하여 對之大泣하고 說伯仁昨危急之狀어늘 仲智가 手批之하니 刁가 爲辟易於戶側이라 旣前에 都不問病하고 直云
君在中朝에 與和長輿로 齊名이러니 那與佞人刁協으로 有情잇가하고
逕便出
注+③ 世說曰 “元帝以鄭后之寵, 欲舍明帝而立簡文. 議者咸謂 ‘舍長立少, 旣於理非倫, 且明帝以聰亮英斷, 宜爲儲嗣.’ 周․王諸公, 竝苦爭懇切, 惟刁玄亮獨欲奉少主, 以阿上旨.”하다
注
應登云 “仲智如恚弟之泣別 責兄之容佞, 其言似正, 亦不近人情.”
11-4
주백인周伯仁이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재직할 때, 관사에 머물다가 밤에 병이 들어 위급하였다. 당시
상서령尙書令이었던
조현량刁玄亮(
조협刁協)이 간호할 때 지극한 정성을 갖추자, 한참 뒤에 〈그의 병세가〉 조금 완화되었다.
注+① 우예虞預의 ≪진서晉書≫에 말하였다. “조협刁協은 자字가 현량玄亮으로, 발해勃海 요안饒安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는데, 비록 깊이 연구하지는 않았으나 섭렵한 바가 많았다. 중흥中興(동진東晉)의 제도는 모두 조협에 의해 제정되었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상서령尙書令으로 승진하였고, 진晉 중종中宗(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이 신뢰하고 존중하였다. 에게 미움을 받자, 군대를 일으켜 그를 토벌했으나 강남까지 달아났다가 패배하여 죽었다.” 다음날 아침에 〈주백인의 아우〉
주중지周仲智(
주숭周嵩)에게 알리자,
注+② 에 말하였다. “주숭周嵩은 자字가 중지仲智로, 주의周顗의 아우이다. 성품이 지조 있고 강직하며 과감하고 의협심이 있어 매번 〈자신의〉 재주와 기개로 타인을 능멸하였다. 왕돈王敦이 사람을 보내 조문하니, 주숭이 ‘돌아가신 형님은 천하에 〈둘도 없는〉 의인이었는데, 천하의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 살해당했으니, 더 이상 어찌 조문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왕돈이 매우 불만스러웠으나 그래도 〈그를〉 데려다가 종사중랑從事中郞을 삼았다가
손성孫盛의 ≪진양추晉陽秋≫에 말하였다. “주숭은 부처를 섬겼기 때문에 사형을 당할 때에도 불경을 낭송하였다.” 주중지가 허둥지둥 찾아왔다.
〈주중지가〉 문에 들어서자마자 조현량이 침상에서 내려와 주중지를 마주보고 크게 울면서 주백인이 어제 처했던 위급한 상황을 설명했으나, 주중지가 손으로 조현량을 밀치자 조현량이 그 때문에 〈원래 자리에서〉 문가로 피했다. 〈주중지는 침상〉 앞으로 나아간 뒤에 병세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은 채 곧장 말하였다.
“당신이
에 있을 때는
화장여和長輿(
화교和嶠)와 명성을 나란히 했었는데, 어찌 아첨배 조협과 친분이 있단 말입니까?”
그러고는 당장 나가버렸다.
注+③ “진晉 원제元帝(사마예司馬睿)가 정후鄭后(정아춘鄭雅春)에 대한 총애 때문에 명제明帝(사마소司馬紹)를 제쳐두고 〈정후 소생의〉 간문제簡文帝(사마욱司馬昱)를 〈태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논자들이 모두 ‘연장자를 제쳐두고 연소자를 세우는 것은 이미 도리로 따졌을 때 윤리적이지 않고, 게다가 명제는 총명하고 과단하니 마땅히 저사儲嗣(태자)로 삼아야 한다.’ 하였다. 주의와 등 여러 공들이 함께 간절하게 충간했으나, 오직 조현량만 소주少主(사마욱)를 받들고자 하여 임금(사마예)의 뜻에 아부하였다.”
注
◦ 유진옹劉辰翁:이 사람(주숭周崇)은 윤호倫好(동년배의 우호)에 대해 이와 같이 〈각박했으니〉, 하물며 명품名品(명성과 품격)을 논의할 만하겠는가.
注
◦ 왕세무王世懋:이 내용은 방정한 행실에 조금 합당하나,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注
◦
유응등劉應登:
아첨꾼을 용납한 형(
주의周顗)을 책망한 것은 그 말이 바른듯하지만 역시 인정에 부합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