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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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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介甫 雅愛馮道注+① 五代史曰 “馮道, 字可道, 瀛州景城人. 初事宦者張承業, 得薦於晉王. 唐莊宗卽位, 拜戶部侍郞, 明宗時, 同中書門下平章事. 晉滅唐, 道又事晉, 加司徒․侍中. 契丹滅晉, 道又事契丹. 漢高祖立, 乃歸漢. 周滅漢, 又事周太祖, 世宗時卒. 道, 少能矯行, 以取稱於世. 當晉與粱夾河而軍, 道居軍中, 爲一茅庵, 不設牀席, 臥一束芻而已. 諸將有拉得美女者以遺, 道寘之別室, 訪其主還之. 父喪, 居景城, 歲饑, 悉出所有, 以賙鄕里, 而退耕於野, 有力不能耕者, 夜往潛爲之耕. 爲大臣, 尤務持重以鎭物. 事四姓十君, 益以舊德自處, 當世士皆仰爲元老, 而喜爲之稱譽.”하니 唐參政曰
道爲宰相하여 使朝易四姓하고 身事十主하니 此得爲純臣乎잇가하니
王曰
伊尹 五就湯하고 五就桀者 正在安人而巳니이다하다
唐曰
有伊尹之志 則可니이다하니
介甫 爲之變色注+② 東都事略曰 “唐介, 字子方, 荊南人. 爲御史裏行, 論文彦博交結宮禁, 貶英州別駕, 彦博亦罷相. 後文復相, 上言 ‘召臣, 未召介, 臣不敢行.’ 仁宗卽起介通判潭州, 尋至大用.”하다


11-42 【가 평소에 풍도馮道를 좋아했는데,注+① ≪신오대사新五代史≫ 〈풍도전馮道傳〉에 말하였다. “풍도는 가도可道로, 영주瀛州 경성景城 사람이다. 처음에 환관 장승업張承業을 섬겨 진왕晉王(이존욱李存勖)에게 천거될 수 있었다. 후당後唐장종莊宗(이존욱)이 즉위한 뒤에 호부시랑戶部侍郞에 제수되었고, 명종明宗(이사원李嗣源) 때에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후진後晉이 후당을 멸망시키자 풍도는 또 후진을 섬겼는데, 사도司徒시중侍中의 지위가 더해졌다. 거란契丹이 후진을 멸망시키자 풍도는 또 거란을 섬겼다. 후한後漢고조高祖(유지원劉知遠)가 등극하자 곧 후한에 귀의하였다. 후주後周가 후한을 멸망시키자 또 후주의 태조太祖(곽위郭威)를 섬기고 세종世宗(곽시영郭柴榮) 때에 세상을 떠났다. 풍도는 젊을 때부터 본마음을 속인 채 행동함으로써 세상에서 명성을 취하였다. 후진과 후량後粱이 황하를 사이에 두고 주둔했을 때, 풍도는 군영軍營에 거처하면서 초가집 한 채를 짓고는 침상을 두지 않은 채 건초 한 다발 위에 누웠을 뿐이었다. 여러 장수 가운데 어떤 자가 미녀를 납치하여 보내주었는데, 풍도는 그녀를 별실에 두었다가 그녀의 주인을 수소문하여 돌려보냈다. 부친상을 당하여 경성景城에 머물 때, 흉년이 들자 가진 것을 모두 꺼내어 고을 사람들을 구휼하였고, 물러나 들판에서 경작했는데 노동력은 있으나 경작할 수 없을 정도로 〈농토가 황폐한 경우에는〉 밤에 가서 몰래 그를 위해 경작해주었다. 대신이 되어서는 자중하고 신중하여 백성을 안정시키는 데 더욱 힘썼다. 4개 성씨의 10명의 군주를 섬겼는데, 더욱 옛 덕행으로 자처하여 당대의 선비들이 모두 원로로 추앙하였고, 그는 그렇게 칭송받는 것을 좋아하였다.” 당참정唐參政(당개唐介)이 말하였다.
“풍도는 재상이 되어 조정에서 자신은 10명의 군주를 섬겼으니, 이런 사람이 순수한 신하가 될 수 있습니까?”
왕안석王安石왕안석王安石
왕개보가 말하였다.
목적은 바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었을 뿐입니다.”
당참정이 말하였다.
“이윤과 같은 뜻이 있었다면 괜찮습니다.”
왕개보가 이 말 때문에 안색이 변하였다.注+왕칭王稱의 ≪동도사략東都事略≫에 말하였다. “당개唐介자방子方으로, 형남荊南 사람이다. 감찰어사이행監察御史裏行이 되었을 때 궁금宮禁(제왕의 비빈妃嬪)과 결탁하여 〈재상이 되었다고〉 탄핵했다가 영주별가英州別駕로 좌천되었고, 문언박도 재상에서 파직되었다. 이후에 문언박이 다시 재상에 복귀했을 때 상주하여 ‘저는 부르고 당개는 아직 부르지 않으셨으니, 저는 감히 〈재상의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인종仁宗이 즉시 당개를 담주통판潭州通判으로 기용하고 얼마 뒤에 중용重用하였다.”


역주
역주1 王介甫(王安石) : 1021~1086. 臨川 사람으로, 字는 介甫, 호는 半山이다. 歐陽修에게 수학하였으며, 唐宋八大家 중의 한 사람이다. 春秋三傳의 가치를 긍정하지 않고, 神宗 때 재상이 되어 정치 개혁을 단행, 靑苗․水利․均輸․保甲․募役․市易․保馬․方田․均稅 등의 新法을 신설하였다가 물의를 빚어 舊法黨 반대로 鎭南軍節度使로 좌천되었다. 이후에 左僕射(좌복야)에 임명되고 哲宗 때에 司空에 이르렀다. 저서로 ≪詩經新義≫․≪尙書新義≫․≪易義≫․≪洪範傳≫․≪周官新義≫․≪王臨集≫ 등이 있다.
역주2 성씨가……하고 : 五代十國시대 華北지역을 통치했던 五代 가운데 後唐의 李氏, 後晉의 石氏, 後漢의 劉氏, 後周의 郭氏를 이른다.
역주3 “伊尹이……나아간 : ≪孟子≫ 〈告子 下〉에 “다섯 번 탕왕을 찾아가고 다섯 번 걸을 찾아간 자는 이윤이었다.[五就湯五就桀者 伊尹也]” 했는데, 朱熹의 주석에 “이윤이 탕왕에게 나아간 것은 세 번이나 초빙하는 성실함 때문이었고, 걸에게 나아간 것은 탕왕이 그를 천거했기 때문이다.[伊尹之就湯 以三聘之勤也 其就桀也 湯進之也]” 하였다.
역주4 文彦博 : 1006~1097. 汾州 介休 사람으로, 字는 寬夫, 號는 伊叟, 시호는 忠烈이며, 潞國公에 봉해졌다. 宋 仁宗․英宗․神宗․哲宗 네 명의 황제를 섬기면서 50년 동안 장수와 재상으로 치적을 이루었다. 밖으로는 王則(왕칙)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四夷에 이름을 떨쳤고, 안으로는 영종을 옹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신종 때 王安石의 新法에 반대하여 쫓겨났다가 철종 때 舊法黨이 부활하자 司馬光의 추천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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