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武
가 將講孝經
에 謝公兄弟
가 與諸人
으로 私庭講習
注+① 續晉陽秋曰 “寧康三年九月九日, 帝講孝經. 僕射謝安侍坐, 吏部尙書陸訥․兼侍中卞耽讀, 黃門侍郞謝石․吏部袁宏兼執經, 中書郞車胤․丹陽尹王混摘句.”이러니 車武子
注+② 續晉陽秋曰 “車胤, 字武子, 南平人. 父育, 爲郡主簿. 太守王胡之有知人識裁, 見謂其父曰 ‘此兒當成卿門戶, 宜資令學問.’ 胤就業恭勤, 博覽不倦. 家貧不常得油, 夏月則練囊盛數十螢火以繼日焉. 及長, 風姿美劭, 機悟敏率. 桓溫在荊州取爲從事, 一歲至治中. 胤旣博學多聞, 又善於激賞, 當時每有盛坐, 胤必同之, 皆云 ‘無車公不樂.’ 太傅謝公遊集之日, 開筵以待之. 累遷丹陽尹․護軍將軍․吏部尙書.”가 難苦問謝
하여 謂袁羊曰
不問
이면 則德音有遺
하고 多問
이면 則重勞二謝
注+③ 袁羊, 喬小字也. 袁氏家傳曰 “喬, 字彦升, 陳郡人. 父環, 光祿大夫. 喬歷尙書郞․江夏相. 從桓溫平蜀, 封湘西伯․益州刺史.”리라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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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馬曜)가 장차 ≪
효경孝經≫을 강독하려고 하여
사공謝公(
사안謝安)
형제兄弟가 여러 사람들과
사가私家에서 〈미리〉
강습講習하였다.
注+① ≪속진양추續晉陽秋≫에 말하였다. “영강寧康 3년(375) 9월 9일에 효무제孝武帝가 ≪효경孝經≫을 강독하였다. 복야僕射 사안謝安은 시좌侍坐하였고, 이부상서吏部尙書 육눌陸訥과 겸시중兼侍中 변탐卞耽은 하고, 황문시랑黃門侍郞 사석謝石과 이부吏部 원굉袁宏은 같이 하고, 중서랑中書郞 차윤車胤과 단양윤丹陽尹 왕혼王混은 하였다.” 차무자車武子(
차윤車胤)가
注+② ≪속진양추續晉陽秋≫에 말하였다. “차윤車胤은 자字가 무자武子이고 남평南平 사람이다. 부친 차육車育은 군주부郡主簿였다. 태수太守 왕호지王胡之는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있었는데, 〈차윤을〉 보고는 그 부친에게 ‘이 아이는 장차 경의 집안을 빛낼 것이니 마땅히 학문을 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차윤은 학문을 탐구하기를 엄숙하고 근면하게 하였으며 광범위하게 독서하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집이 가난하여 늘 기름을 얻지 못하여 여름철이면 비단주머니에 수십 마리의 반딧불을 넣어 밤까지 독서를 하였다. 장성하여서는 풍모가 아름다웠으며 기지가 민첩하였다. 환온桓溫이 형주荊州에 있으면서 데려다가 종사從事로 삼았는데 한 해 만에 에 이르렀다. 차윤은 박학다식한 데다가 또 칭찬과 격려를 잘하여 당시에 성대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차윤이 반드시 동석하였는데, 모두들 말하기를 ‘차공車公이 없으면 즐겁지 않다.’라고 하였다. 태부太傅 사공謝公(사안謝安)은 어울려 노는 날이면 그의 자리를 마련해놓고 기다렸다. 여러 벼슬을 거쳐 단양윤丹陽尹․호군장군護軍將軍․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사공에게 질문하기를 꺼려하여
원양袁羊에게 말했다.
“묻지 않으면 훌륭한 말씀을 놓치겠고, 많이 물으면 두 분을 수고롭게 할 것입니다.”
注+③ 원양袁羊은 원교袁喬의 어릴 적 이름이다.
≪원씨가전袁氏家傳≫에 말하였다. “원교는 자字가 언승彦升이고 진군陳郡 사람이다. 부친 원환袁環은 광록대부光祿大夫였다. 원교는 상서랑尙書郞과 강하상江夏相을 거쳤다. 환온桓溫을 따라 촉蜀을 평정하여 상서백湘西伯과 익주자사益州刺史에 봉해졌다.”
“밝은 거울이 자주 비춰보는 것을 피곤하게 여기거나 맑은 물이 부드러운 바람을 꺼리는 것을 어찌 본 적이 있습니까?”
注
◦ 응등應登:‘적구摘句’라는 것은 의문스러운 것을 뽑아서 질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