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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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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林道在西岸注+① 陳逵别傳曰 “逵, 字林道, 潁川許昌人. 祖淮太尉, 父畛光祿大夫. 逵少有幹, 以清敏立名. 襲封廣陵公, 黃門郎․西中郎將․領梁淮南二州太守.” 晉陽秋曰 “逵爲西中郎將․領淮南太守, 戍歷陽.” 都下諸人至牛渚會러니 陳理既佳하여 人欲共言折이나 陳以如意拄頰하고 望鷄籠山歎曰
孫伯符志業不遂注+② 吳錄曰 “長沙桓王策, 少有雄姿風氣, 年十九而襲業, 衆號孫郎. 平定江東, 爲許貢客射破其面, 引鏡自照, 謂左右曰‘面如此, 豈可復立功乎?’ 乃謂張昭曰‘中國方亂, 夫以吳․越之衆, 三江之固, 足以觀成敗. 公等善相吾弟.’ 呼大皇帝授以印綬曰‘舉江東之衆, 決機於之間, 卿不如我, 任賢使能, 各盡其心, 我不如卿. 慎勿北渡!’ 語畢而薨, 年二十有六. ”라하니
於是竟坐不得談이라
【頭註】
劉云 “可嘆.”


23-13 진림도陳林道(진규陳逵)가 〈건강建康의〉 注+① ≪진규별전陳逵别傳≫에 말하였다. “진규陳逵임도林道이고, 영천潁川 허창許昌 사람이다. 조부 진회陳淮태위太尉였고, 부친 진진陳畛광록대부光祿大夫였다. 진규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었고 깨끗한 인품과 명민함으로 명성을 얻었다. 광릉공廣陵公을 세습하였으며 황문랑黃門郎서중랑장西中郎將을 역임하였고 양주梁州회남주淮南州 2개 를 다스리는 태수太守를 지냈다.
진양추晉陽秋≫에 말하였다. “진규는 서중랑장, 회남淮南을 다스리는 태수가 되어 역양歷陽을 지켰다.”
수도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초대하여 에서 만났다. 진임도는 〈담론의〉 논리가 뛰어나 사람들이 모두 그를 꺾어보고자 하였으나 진임도는 여의봉으로 턱을 괴고 을 바라보며 탄식하였다.
注+에 말하였다. “장사환왕長沙桓王 손책孫策은 어려서부터 걸출한 용모와 기품이 있었고 19세에 왕업을 계승하여 사람들이 그를 ‘손랑孫郞’이라 불렀다. 강동江東 지역을 평정할 때 의 빈객에게 화살을 맞아 얼굴을 다쳤다.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고는 좌우에게 이르기를, ‘얼굴이 이와 같으니 어찌 다시 공업功業을 세울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서 에게 말하였다. ‘중국이 한창 혼란스러우니 땅의 군사와 삼강三江의 견고함으로 충분히 성패를 볼 만하다. 공들이 내 아우를 잘 보필하라.’ 대황제大皇帝(손권孫權)를 불러 인신印信과 인끈을 주며 말하였다. ‘강동의 군사를 동원하여 두 진영 사이에서 〈전투의〉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경이 나만 못하지만, 어진 사람을 임명하고 인재를 부려 각각 충성을 바치게 하는 것은 내가 경만 못하다. 부디 북쪽으로 건너가지 말라.’ 말을 마치고 죽으니, 26세였다.”
두주頭註
유진옹劉辰翁:〈진규의 호방함이〉 탄복할 만하다.


역주
역주1 西岸에 있을 때 : 진규는 이때 西中郎將․領淮南太守으로 歷陽(安徽省 和縣)에 있었다. 역양은 수도인 健康의 강 건너편 서남쪽에 있으므로 ‘西岸’이라 한 것이다.
역주2 牛渚 : 歷陽의 건너편에 있는 地名이다.
역주3 鷄籠山 : 역양의 서북쪽 교외에 있는 산이다.
역주4 孫伯符(孫策)는……못하였구나 : 孫策(175~200)은 부친인 孫權의 뒤를 이어 江南 지역을 통일하는데 성공하여 吳(삼국)왕조의 기초를 세웠고, 강남 지역 뿐 아니라 널리 中原을 통일하려는 큰 뜻을 품었으나 결국 그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여기서 진규는 자신도 손책과 마찬가지로 中原을 평정해야 하는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한탄한 것이다.(≪世說箋本≫)
역주5 ≪吳錄≫ : 吳(三國)나라 歷史를 기술한 史書로, 晉나라 사람 張勃이 편찬하였다. 현재 1권이 남아 있으며, 이는 淸나라 때 重修한 본이다. ≪三国志≫의 ≪吴书≫ 중 상당 부분을 이 책에서 근거하였다고 한다.
역주6 許贡 : 东汉末의 官吏로, 吴郡都尉․太守였을 때 몰래 曹操에게 전갈하여 孙策을 경계하게 하였다가 도리어 손책에게 발각되어 피살되었다.(≪三国志≫ 〈蜀志 许靖传〉, ≪三国志≫ 〈吴志 孙策传〉)
역주7 張昭 : 156~236. 後漢 말기에서 呉(三国)나라에 걸쳐 활동했던 관원으로, 字는 子布이고 諡號는 文侯이다. 孫策이 揚州에서 挙兵했을 때 그의 参謀로 초빙되었고, 손책의 신임을 받아 정치․군사 일체를 관장하였다. 손책이 急死할 때 그를 침석에 불러 아우 孫権을 補佐하도록 부탁하였고, 손권에게 内政에 대해서는 張昭에게 相談하라고 명하였다.
역주8 이리하여……없었다 : 좌중의 빈객들이 진규의 이런 호방함에 눌려 담론할 맛을 잃은 것이다.(≪世說箋本≫)
역주9 : 邀와 같다. 부르다, 초대하다의 의미이다.(≪世說音釋≫)
역주10 兩陣 : 이쪽과 저쪽이 대적하므로 ‘兩陣’이라 한 것이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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