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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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郗超 與謝玄으로 不善이라 苻堅하여 旣已狼噬梁岐하고 又虎視淮陰矣注+① 車頻秦書曰 “苻堅, 字永固, 武都氐人也. 本姓蒲, 祖父洪詐稱讖文, 改曰苻, 言已當王應符命也. 堅初生, 有赤光, 流其室, 及誕, 背赤色隱起若篆文. 幼有美度, 石虎司隷徐正名知人, 堅六歲時, 嘗戱於路, 正見而異焉, 問曰 ‘苻郞, 此官街, 小兒行戱, 不畏縛耶?’ 堅曰 ‘吏縛有罪, 不縛小兒.’ 正謂左右曰 ‘此兒有王霸相’. 石氏亂, 伯父健及父雄, 西入關, 健夢天神使者朱衣冠, 拜肩頭爲龍驤將軍, 肩頭, 堅小字也. 健即拜爲龍驤, 以應神命. 後健僭帝號, 死. 子生立, 凶暴, 群臣殺之而立堅. 堅立十五年, 遣長樂公丕, 攻沒襄陽, 十九年大興師伐晉. 衆號百萬, 水陸俱進, 次于項城, 自項城至長安, 連旗千里, 首尾不絶. 乃遣告晉曰 ‘已爲晉君於長安城中建廣夏之室, 今故大擧渡江相迎, 入宅也.’” 于時 朝議遣玄北討한대 人間頗有異同之論이어늘 唯超曰
是必濟事리라 吾昔嘗與共在桓宣武府일새 見使才皆盡하니 雖履屐之間이라도 亦得其任이라 以此推之컨대 容必能立勲이라하다
元功旣擧 時人咸歎超之先覺하고 又重其不以愛憎匿善注+② 中興書曰 “于時氐賊彊盛, 朝議求文武良將可鎭靖北方者, 謝大將軍安曰 ‘唯兄子玄可任此事.’ 中書郞郗超聞而嘆曰 ‘安違衆擧親, 明也. 玄必不負其擧.’”이라
【頭註】
王云 “正史堅姓從苻, 卽蒲之變也. 此云當應符命從竹, 非是.”
又云 “石虎時正姓蒲, 不得云符郞.”


14-27 치초郗超사현謝玄과 사이가 나빴다. 부견苻堅이 장차 나라를 병탄할 생각으로 이미 이리처럼 을 집어삼켰고, 또 호시탐탐 회수淮水 남쪽지역을 노리고 있었다.注+차빈車頻의 ≪진서秦書≫에 말하였다. “부견苻堅영고永固이고, 무도武都 사람이다. 본래의 였는데, 조부인 포홍蒲洪참문讖文을 사칭하여 로 바꿨으니, 자신이 왕에 된다는 부명符命을 받았음을 말한 것이다. 부견이 처음 태어날 때 붉은 빛이 나타나 그 집에 흘렀고, 태어났을 때 등에 붉은 색으로 전서체篆書體를 새긴 것처럼 도드라져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태도가 있었다. 석호石虎사예司隷 서정徐正이 인물을 알아보는 능력으로 이름났는데, 부견이 6세 때 길에서 놀고 있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고 기이하게 여겨 그에게 묻기를, ‘부랑苻郞, 여기는 관가官街인데 어린 아이가 놀고 있으니 잡혀가는 것이 두렵지 않느냐.’ 하였다. 부견이 말하기를, ‘관리는 죄 지은 자를 잡아가지 어린아이는 잡아가지 않습니다.’ 하니, 서정이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왕자王者패자覇者가 될 이 있다.’라고 하였다. 석씨石氏이 일어났을 때 백부伯父부건苻健과 부친 부웅苻雄이 서쪽 관문에 들어왔는데, 부건의 꿈에 붉은 옷을 입고 관을 쓴 천신天神의 사자가 견두肩頭용양장군龍驤將軍에 임명하였다. 견두는 부견의 어릴 때 이름이다. 부건은 즉시 그를 용양장군에 임명하여 신명神命에 부응하였다. 후에 부건이 황제를 참칭僭稱하였다. 그가 죽자 그 아들 부생苻生이 즉위했는데 흉포하니, 여러 신하가 그를 죽이고 부견을 세웠다. 를 보내 양양襄陽을 함락시켰고, 19년에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정벌하였다. 100만이라 부르는 군사가 수륙水陸 양쪽으로 진격하여 항성項城에 진을 치니, 항성에서 장안長安까지 천리나 깃발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었다. 마침내 사람을 보내 나라에 고하기를, ‘이미 진군晉君을 위해 장안성長安城 안에 장대한 집을 지어놓았고, 이제 일부러 대대적으로 강을 건너 맞이하러 왔으니, 날을 잡아 그 집에 들어가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사현을 파견하여 북쪽을 토벌하게 할 것을 논의하였는데, 사람들 사이에 찬반贊反 의견이 상당히 달랐다. 그런데 치초만은 말하였다.
“이 일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내가 예전에 환선무桓宣武(환온桓溫)의 에서 〈사현과〉 함께 근무하였을 때 그가 모든 사람들이 모두 재주를 다 발휘하게 하여 비록 나막신을 신는 〈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직임에 맞게 썼다. 이것으로 미뤄보건대 아마도 그는 반드시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사현이〉 큰 성공을 거두자 당시 사람들이 모두 치초가 선견지명이 있음에 탄복하였고, 또 그가 애증愛憎 때문에 〈사현의〉 장점을 가리지 않은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注+② ≪중흥서中興書≫에 말하였다. “이때 저적氐賊이 강성하니 조정에서 북방을 진압시킬 수 있는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장수를 구하는 논의가 있었는데, 대장군 사안謝安이 말하기를, ‘형님의 아들 사현謝玄만이 이 일을 맡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중서랑 치초郗超가 그 말을 듣고 탄복하며 말하였다. ‘사안이 대중의 뜻을 어기고 친척을 추천한 것은 현명하다. 사현은 필시 그의 추천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두주頭註
왕세무王世懋정사正史부견苻堅의 성을 ‘’로 썼으니, 즉 가 변한 것이다. 마땅히 ‘부명符命’이라고 할 때처럼 〈자의 ⺿를〉 자로 구성하여야 된다고 하지만 옳지 않다.
◦ 왕세무:석호石虎 때의 〈부견苻堅의〉 바른 은 ‘’였으니 부랑符郞이라고 할 수 없다.


역주
역주1 梁山과 岐山 : 원문은 “梁岐”인데, ≪世說音釋≫에서는 ‘梁’을 夏陽縣에 있는 梁山으로 보고 ‘岐’를 美陽縣에 있는 岐山으로 보았다. ≪世說新語箋疏≫(余嘉錫)에서는 ‘梁’을 ‘梁州’로 보았는데, 이는 寧康 元年(373) 겨울에 苻堅의 前秦이 梁州와 益州를 취하였다는 것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나 ‘岐’자에 대해서는 지명을 확정하지 못하고 다만 益州를 나타내는 ‘益’자의 오류가 아닐까 추정하였다. 본고는 ≪世說音釋≫의 견해를 따라 번역하였다.
역주2 부견이 선 지 15년 : 원문은 ‘堅立十五年’인데, 여기서 말하는 15년과 다음에 말한 19년은 부견이 처음 자립한 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견의 秦나라가 ‘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지 15년, 19년을 말한다. 그에 의하면, 건원 15년은 379년이고, 건원 19년은 383년이다.(≪世說新語箋疏≫(余嘉錫))
역주3 長樂公 丕 : 부견의 장남인 苻丕로, 永樂公에 봉해졌다.(≪世說音釋≫)
역주4 問晉鼎 : ≪春秋左氏傳≫ 宣公 3년 조에 “楚王이 陸渾의 오랑캐를 치고 周나라 국경 가까이서 군사를 사열하였다. 천자가 王孫滿을 보내 위로하니 초왕이 周鼎의 輕重을 물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周鼎’의 ‘鼎’은 九鼎이다. 구정은 夏ㆍ商ㆍ周 3대에 전해지던 보물로, 천하를 소유한 자만이 가질 수 있었으므로 초왕이 주나라의 九鼎에 대해 물은 것은 주나라를 탈취할 뜻을 보인 것이다. 따라서 晉鼎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그가 晉나라를 침략할 뜻이 있음을 말한다.
역주5 克日 : 克은 刻과 같다. 刻日은 ‘날을 정하다’라는 의미이다.(≪世說音釋≫)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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