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朝人
이 共論少正卯
注+① 孔子家語曰 “孔子爲魯司寇七日, 而誅亂政大夫少正卯, 戮之於兩觀之下, 屍於朝三日. 子貢進曰 ‘夫少正卯, 魯之聞人也. 今夫子爲政而始誅之, 或者爲失乎?’ 孔子曰 ‘居. 吾語汝以其故. 天下有大惡者五, 而竊盜不與焉. 一曰心逆而險, 二曰行僻而堅, 三曰言僞而辯, 四曰記醜而博, 五曰順非而澤, 此五者有一于人, 則不免君子之誅, 而少正卯皆兼有之. 其居處足以撮徒成黨, 其談說足以飾褒衆, 其强禦足以反是獨立. 此乃人之姦雄者也, 不可以不除.’”․盜跖
注+② 莊子雜篇曰 “柳下季之弟, 名曰盜跖. 盜跖徒卒九千人, 橫行天下, 侵暴諸侯, 穴室樞戶, 驅人牛馬, 取人婦女. 貪得忘親, 不顧父母兄弟, 不祭先祖. 所過之邑, 大國守城, 小國入保, 萬民苦之. 孔子往說之, 盜跖乃方休卒徒泰山之陽, 膾人肝而餔之. 孔子前見謁者, 盜跖大怒, 目如明星, 髮上指冠, 曰 ‘子 疾走歸. 不然, 將以子肝益晝餔之膳.’”은 其惡孰深
이러니 有人云
少正卯雖姦이나 不至剖人充膳하니 盜跖爲甚이라하니
爲惡彰露면 人思加戮이나 隱伏之姦은 非聖이면 不誅하나니 由此言之컨대 少正爲甚이라하니
18-47 【
보補】
중조中朝(
동진東晉)의 사람들이
소정묘少正卯와
注+①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말했다. “공자孔子가 노魯나라의 사구司寇가 된지 이레 만에 국정을 어지럽힌 대부大夫 소정묘少正卯를 주살했는데, 아래에서 처형하고 시신을 사흘 동안 조정에 그대로 두었다.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나아가 ‘저 소정묘는 노나라의 유명한 사람입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정사를 행하시면서 가장 먼저 그를 주살하셨습니다. 혹시 실수하신 것은 아닌지요?’라고 하니, 공자가 ‘앉아라. 내가 너에게 그 까닭을 말해 주겠다. 천하에는 다섯 가지의 큰 죄악이 있는데 절도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첫째는 마음속으로 거역하면서도 음험한 것이고, 둘째는 행실이 편벽되면서도 고집스러운 것이고, 셋째는 말이 〈내용은〉 거짓인데도 번지르르한 것이고, 넷째는 추한 것을 기억하면서도 〈그런 것을〉 많이 아는 것이고, 다섯째는 잘못을 그대로 따르면서 꾸미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가운데서 하나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군자君子의 주벌을 면하지 못할 것인데, 소정묘는 모두 다 가지고 있다. 그의 거처는 무리를 모아 붕당을 이루기에 충분하고, 그의 언변은 꾸미고 칭찬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하고, 그의 횡포함은 옳은 것을 뒤집고 홀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기에 충분하다. 이런 사람이 바로 간웅姦雄이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도척盜跖은
注+② ≪장자莊子≫ 〈잡편雜篇〉에 말했다. “유하계柳下季의 동생은 이름이 도척盜跖이다. 도척의 병졸은 9천명이었다. 천하를 횡행하면서 제후들을 침범하고 약탈하였으며 남의 집에 구멍을 뚫고 문지도리를 뜯어내어 남의 소와 말을 끌고 가고 남의 부녀자를 빼앗았다. 이득을 탐하여 혈연도 잊고 부모형제를 돌보지 않으며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들이〉 지나가는 고을이 큰 나라이면 〈사람들이 그〉 성을 굳게 지키고 작은 나라이면 〈사람들이〉 보루로 들어갔으니 만백성들이 그들 때문에 괴로웠다. 공자가 설득하러 갔는데 도척이 이때 태산泰山의 남쪽에서 부하들을 쉬게 하면서 사람의 간을 회쳐서 새참으로 먹고 있었다. 공자가 앞으로 가서 알자謁者를 만나자 도척이 크게 노했다. 눈에는 불이 뚝뚝 떨어지고 머리카락은 관冠을 찌를 듯이 하며 ‘그대의 죄는 크고 지극히 무겁다. 빨리 뛰어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간을 낮 새참 반찬에 보태겠다.’라고 하였다.” 그 죄악이 누가 심한지를 같이 논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했다.
“소정묘는 비록 간사하지만 사람을 갈라 반찬으로 쓰기까지는 하지 않았으니 도척이 심합니다.”
“드러내 놓고 죄악을 저지르면 사람들이 죽일 생각을 하지만,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는 간사함은 성인聖人이 아니면 처벌하여 죽일 수가 없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말하자면 소정묘가 심합니다.”
사람들 중 누구도 〈그의 말을〉 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