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永和
가 杜門却掃
하고 絶跡
하며 棄産營書
이라 手自刪削
에 每歎曰
丈夫擁書萬卷
이어니 何假
百城
注+① 北史曰 “李謐, 字永和. 少好學, 周覧百氏. 初師小學博士孔璠, 數年後璠還就謐請業. 同門生爲之語曰 藍謝青, 師何常? 在明經.’ 徴拜著作佐郎, 辭以授弟郁, 詔許之. 州再舉秀才, 公府)二辟, 竝不就. 唯以琴書爲業, 有絶世之心. 及卒, 博士孔璠等奏諡, 爲貞静處士.”이리오하다
23-18 【보補】 이영화李永和(이밀李謐)는 대문을 닫고 〈인사人事를〉 사절하였으며, 발길을 끊고 휘장을 내린 채 집안 살림을 내평개치고 서책에만 신경 썼다. 손수 서적을 산삭刪削할 때마다 매번 탄식하며 말하였다.
“장부가 만 권의 서적을 지녔는데, 어느 겨를에 높은 벼슬을 하여 많은
성城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注+① ≪북사北史≫ 〈이밀전李謐傳〉에 말하였다. “이밀李謐은 자字가 영화永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하였다. 처음에 소학박사 공번孔璠을 스승 삼았는데, 몇 년 뒤에는 공번이 도리어 이밀에게 나아와 배우기를 청하였다. 같은 문하의 생도들이 말하기를, ‘청색靑色이 남색藍色을 만들었으나 남색이 청색만 못하구나. 스승이 어찌 일정하겠는가. 경서經書에 밝은 데 달려 있다.’라고 하였다. 저작좌랑著作佐郎에 초빙되었으나 아우 이욱李郁에게 제수하는 것으로 사양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 주州에서 재차 그를 수재秀才로 천거하였고 공부公府에서 두 번이나 그를 초빙하였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오로지 가야금 연주와 독서로 본업을 삼고 세상과 단절하려는 마음을 지녔다. 그가 죽자 박사 공번 등이 시호諡號를 내려줄 것을 상주하여 ‘정정처사貞静處士’가 되었다.”